삼성라이온즈21 | 9장 역사속의 사건사고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프로야구 사상 첫 몰수게임은 1982년 8월 26일 대구 MBC전에서 5-2로 앞선 4회말, 1루 주자 배대웅과 MBC 2루수 김인식의 충돌이 발단이 됐다. 김인식이 배대웅의 얼굴을 때려 양팀 선수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어 김인식에게 퇴장명령이 내려지자 백인천 MBC 감독이 선수들을 철수시킨 것. 결국 주심이 몰수게임을 선언했다. 삼성 9-0 승리.

프로야구 사상 첫 몰수경기

프로야구 사상 첫 몰수게임은 1982년 8월 26일 MBC청룡과의 대구경기에서 일어났다. 전기리그 우승을 OB베어스에 넘겨준 상태라 후기리그 우승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있던 서영무(徐永武) 감독에게는 한 경기 한 경기가 피 말리는 싸움이기도 했다. 후기리그로 접어들어서도 OB와 선두 다툼을 계속 벌여 중반기로 접어든 8월 25일까지도 우승에 대한 향방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8월 25일 현재 16승6패(승률 0.727)로 승점에서는 14승5패(승률 0.737)인 OB보다 0.5경기 앞섰으나 승률에서는 1푼이 뒤져 2위였다. 하지만 뜻밖의 사건이 서영무 감독에게 상승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MBC의 백인천(白仁天) 감독이 경기를 포기해 몰수게임승(9-0)을 따낸 것이다. 프로야구 사상 첫 몰수게임으로 기록된 8월 26일의 대구 MBC전 전말은 이렇다. MBC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 경기에서 삼성은 2회 말 3점을 선취, 사기가 올랐으나 4회 초 2점을 내줘 3-2로 박빙의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4회 말 2점을 보태 5-2로 앞선 뒤 1사 1, 2루의 득점 찬스를 맞아 공격은 계속됐다.

그러나 3번 정현발(鄭鉉發)이 유격수 앞 땅볼을 때려 병살의 위기를 맞았다. 1루에서 2루로 쇄도하던 배대웅(裵大雄)은 병살을 저지하기 위해 슬라이딩을 했고 이 과정에서 MBC 2루수 김인식(金仁植)과 충돌을 한 것이다. 화가 난 김인식이 그냥 넘어갈 턱이 없었다. 그가 배대웅의 얼굴을 때리자 양측 덕 아웃에서 이를 지켜 보던 선수들이 몰려 나가 한 덩어리로 엉겨 붙었다. 김인식의 주먹질이 큰 싸움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싸움은 김동앙(金東昻) 주심과 심판들이 뜯어 말려 가까스로 진정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동앙 주심이 불을 질렀다. 김인식에게 퇴장을 명한 것이다. 다혈질인 백인천 감독이 이를 보고만 있지 않았다. 싸움의 발단인 배대웅은 그냥 두고 김인식만 퇴장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며 선수들을 덕 아웃으로 철수시켰다.

김동앙 주심이 백인천 감독에게 경기에 임해줄 것을 몇 번 요구했다. 그러나 백 감독은 마이동풍이었다. 경기 중단 25분이 경과하자 김동앙 주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몰수게임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한국야구위원회는 8월 28일 6인 상벌위원회를 열어 MBC구단에 제재금 200만원, 당일 입장료 및 TV 중계료를 전액 배상케 했고 백인천 감독에게는 제재금 100만원과 5경기 출전 정지, 싸움의 발단이 된 김인식에게는 제재금 10만원만 부과했다. 그러나 경기를 원만하게 진행하지 못한 김동앙 및 2루심을 맡은 박명훈(朴明勳) 심판에게도 징계가 내려졌다. 후일담이지만 김인식이 제재금 외에 경기 출장정지 처분까지 받았다면 프로야구 최초인 606경기 연속출전 기록이 61경기에서 끝날 뻔했다. 몰수게임이 61경기 연속 출전이었고 이 고비를 넘어 6년간 전 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또한 삼성은 이 경기의 몰수게임승으로 3연승을 질주, 9월 2일 대전 OB전까지 7연승을 올려 OB를 1.5 경기 차로 밀어내고 프로야구 첫 후기리그 우승의 열매를 따게 됐다.

1982년 코리언시리즈에서 패권을 놓고 다툰 OB와 라이벌 관계를 벗어나 앙숙지간이 된 것은 1983년 10월 27일 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였다. 일본 유학을 이유로 OB에 사퇴의사를 밝힌 김감독이 10여일 만에 삼성 감독으로 부임해온 것이 발단이 됐다.

앙숙이 된 라이벌

1982년 코리언 시리즈에서 패권을 놓고 다툰 OB와 라이벌 관계를 벗어나 앙숙지간이 된 것은 1983년 10월 27일 김영덕(金永德) 감독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였다. 1983 시즌까지만 해도 OB와의 사이는 원만했다. OB가 에이스 박철순(朴哲淳)의 허리 고장으로 5위를 한 것처럼 삼성도 감독 교체로 팀워크가 흩어져 시즌 내내 고전을 거듭하다 4위로 처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10월 14일 서울 여의도 OB구단 사무실에서 김영덕 감독이 “박철순의 허리 부상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고 감독 재계약 포기 의사를 밝힌 뒤 “일본에 건너가 야구 공부나 하겠다”며 사퇴한 것이다. OB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구단주까지 나서서 김 감독의 사퇴를 만류하며 “일본 유학을 떠날 경우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 감독이 말한 대로 일본으로 떠났다면 OB와 앙숙이 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OB에 사퇴 의사를 밝힌 지 10여일만인 10월 27일 삼성 감독으로 부임해 왔다. 김 감독에 대한 비난을 넘어 이젠 삼성으로 화살이 날아왔다. “사전에 각본을 짜 감독을 빼돌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삼성은 김영덕 감독이 OB를 사퇴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삼미에서 지휘봉을 잡았던 김진영(金振榮) 감독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하기 위해 정지작업을 끝낸 상태였다. 이를 위해 노진호(盧鎭浩) 부단장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한양대의 배성서(裵星瑞) 감독을 비롯해 한국화장품의 강태정(姜泰貞) 감독 등 4, 5명과 접촉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OB의 김성근(金星根) 코치와 만나 감독으로 영입할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코치가 이를 거절하자 대신 김진영 감독을 의중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김영덕 감독의 ‘OB 감독 사퇴’가 삼성의 감독 영입 작업에도 혼선을 빚게 했다. 결국 노진호 부단장은 10월 25일 심사숙고 끝에 김진영 감독 대신 김영덕 감독을 차기 삼성 사령탑으로 택해 감독 인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감독 사상 최고 대우인 감독 사상 최고 대우인 계약금 3,000만원, 연봉 3,000만원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일로 허를 찔린 OB는 가만 있지 않았다. 즉각 맞대응하고 나섰다. 1983년 5월 26일 일선에서 물러난 서영무 감독이 계약 만료일(11월 30일)을 넘기자 12월 1일 OB구단 관리이사로 영입하며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다. 이런 감정 싸움은 1984 시즌이 시작되면서 OB 선수들 입에서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1984년 OB와의 첫 경기는 4월 10일 대구에서 벌어졌다. 김영덕 감독이 OB를 떠난 이후 첫 해후의 자리가 되기도 했다. 이유야 어디 있든 전임 감독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OB 선수들이 김 감독을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게 도리였다. 하지만 OB 선수들은 누구 하나 김 감독과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김 감독 입장에서 보면 괘씸한 일이었다. 두 번째 경기가 벌어진 4월 11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의 4월 12일. 경기 시작 전 OB 선수들이 김영덕 감독을 찾아와 인사를 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냉정하게 돌아 앉아 이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OB 선수들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었다. 또 한 번 상처를 입은 OB 선수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김 감독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며 야유를 퍼부어 댔다. OB를 지휘하고 있던 김성근 감독도 듣기 거북해 이들을 만류했으나 듣지를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배원영(裵元榮)의 목소리가 유별나게 컸다. 배원영은 이제 갓 입단한 신인이어서 김영덕 감독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 분위기에 휩싸여 목청껏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그날 경기가 끝난 뒤,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OB 선수들은 김영덕 감독을 찾아가 사과를 했다. 하지만 잔뜩 기분이 상해 있던 터라 김 감독은 사과를 받는 대신 배원영의 뺨을 때리며 야단을 쳤다. 분위기가 일순 험악해졌다. 주위에 있던 김종만(金鍾滿) 매니저를 비롯해 코치들의 만류로 아무 일 없이 끝났지만 OB 선수들의 가슴 속에 또 하나의 앙금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두 팀이 감정을 폭발시킨 것은 1984년 5월 2일 대전 경기에서였다. 5월 1일 김시진의 호투와 이만수의 3점 홈런을 포함, 4타수 3안타 4타점에 힘 입어 6-2로 승리한 뒤 5월 2일 경기에서도 초반부터 OB 마운드를 난타, 9-2로 일찌감치 승세를 굳혀 놓고 있었다. 그러나 11-4로 크게 앞선 8회 말 OB 선수들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충돌의 발단은 1회 초 계형철(桂瀅鐵)의 ‘고의 사구’가 문제였다. 김근석(金瑾錫)이 볼에 얻어맞자 벤치에서 벌떼처럼 항의하고 나섰다. 그러나 심판들의 만류로 없었던 일이 됐다. 하지만 8회 말 이번에는 김일융(金日融)이 던진 볼이 조종규(趙鍾奎)의 몸에 맞자 OB 선수들이 흥분해 마운드로 달려갔고 삼성 선수들도 달려나가 몸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OB 선수들에게 얻어맞은 김근석은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폭력을 휘두른 OB 선수들 몇 명이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곤혹스런 일까지 겹쳤다.

OB 선수들과의 충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월 12일 대구로 장소를 옮겨 주중 2연전을 치른 1차전에서 OB가 0-1로 패한 뒤 14일에 열린 2차전 6회 말 문제가 터졌다. OB 3루수 양세종(楊世鍾)이 포수 김경문(金卿文)의 견제 송구를 받아 글러브로 3루 주자 천보성을 태그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친 것이 발단이었다. 삼성 선수들이 고의로 머리를 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큰 충돌 없이 무마됐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흥분을 참지 못해 빈 병을 내던진 것이 OB 1루수 구천서(具千書)의 머리에 맞아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은 것이다.

OB와 맞붙으면 사고가 난다는 말이 나돌 만큼 또 한 차례 격렬한 충돌이 6월 2일 대전구장에서 일어났다. 2회 말 내야 실책으로 출루한 OB의 이홍범(李洪範)이 후속 타자(조범현·曺凡鉉)의 투수 앞 보내기 번트 때 병살을 막기 위해 2루로 뛰어들면서 수비하던 유격수 오대석(吳大錫)의 허벅지를 걷어차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홍범은 5경기 출전 정지를 당했지만 오대석은 이 부상으로 1991년 은퇴할 때까지 병마와 싸워야 했다.

해태 버스 방화

1986년 패권을 가리는 한국시리즈는 플레이오프에서 3승2패로 OB를 꺾고 올라온 삼성과 전·후기리그서 2위를 차지, 자동으로 진출권을 딴 해태의 대결로 10월 19일 광주에서 막이 올랐다. 예상대로 해태는 투수 선동열(宣銅烈)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동열은 시원스런 피칭을 구사하지 못했다. 9월 13일 잠실 MBC전에서 다친 허리 부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삼성은 제대로 공격을 못해 6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를 뽑을 정도로 부진을 보였다. 플레이오프의 피로가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OB와의 플레이오프전은 10월 17일 끝났다. 10월 18일은 휴식일이었지만 한국시리즈를 위해 광주로 이동했으므로 10월 15일 플레이오프 3차전 이후 단 하루도 쉬지를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해태는 10월 7일 OB와의 후기리그 우승 결정전을 끝낸 이후 휴식과 훈련으로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왔으므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시리즈 1차전은 막상막하로 전개됐다. 삼성이 6회까지 빈타에 허덕인 것처럼 해태도 찬스를 살려내지 못했다. 양일환을 선발로 내세워 불안하게 출발한 김영덕 감독은 3회에 성준으로 교체했으나 2사에서 1, 3루의 위기를 맞자 지체없이 진동한을 투입해 불을 껐다. 선취점을 올린 것은 삼성이었다. 7회 초 1사 후 이만수가 좌월 2루타로 포문을 열자 김성래가 화답하듯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날려 2점을 뽑았다. 그러나 문제가 터졌다. 7회 말까지 14명의 타자를 상대로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뒤 덕 아웃으로 들어오던 투수 진동한이 관중이 던진 유리병에 머리를 맞은 것이다. 큰 부상은 면했지만 붕대로 머리를 감아 등판할 처지가 못됐다. 김시진이 구원 등판했다. 2이닝만 버티면 첫 승리를 챙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김시진은 등판하자마자 2명의 타자를 가볍게 처리했다. 나머지 1명만 잡으면 무실점으로 8회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김성한에게 우전 2루타를 허용한 뒤 김봉연에게 우전 적시타를 허용해 1점을 내줬다. 9회 초엔 삼성이 밀어내기로 1점을 추가, 3-1로 리드를 지켰다. 하지만 9회 말 1사 후 사사구 4개를 내준 끝에 2점을 허용, 연장전에 들어갔으나 11회 말 조충열의 중전 안타에 이은 김일권의 보내기 번트, 서정환의 볼넷과 김성한의 결승타를 얻어 맞아 3-4로 무릎을 꿇었다. 악몽 같은 4시간 8분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선수나 코칭스태프보다 TV로 경기를 지켜본 대구의 팬들이었다. 광주 팬들의 난동으로 진동한이 부상을 당해 패했다고 울분을 삭이지 못했다.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10월 22~23일 대구에서 벌어질 3, 4차전을 앞두고 걱정부터 했다. 대구 관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사실이었다. 10월 22일 3차전이 시작되자 전에 없이 격렬한 야유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특히 2회 초 2사에서 김준환의 솔로 홈런에 이어 차영화의 2점 홈런으로 3-3 동점을 만들자 야유와 함께 빈 병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점잖은 응수였다. 하지만 7회 초 2안타, 2볼넷에 이은 김성래의 실책으로 3점을 잃으면서 시작된 관중들의 난동은 경기가 5-6으로 삼성이 패한 가운데 끝나자 극에 달해 해태 버스에 불을 지르는 사태로 번졌다.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 사건으로 기록된 대구 관중 난동은 광주에서 있었던 1차전의 패배가 원인이었다. 패배의 원인을 관중들이 던진 병에 진동한이 머리를 다친 탓으로 돌린 것이다. 3차전에서 삼성이 이겼다면 야유와 욕설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역전패를 당하자 흥분한 관중들은 밖으로 쏟아져 나와 마침 선수를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던 해태의 45인승 리무진 버스에 울분을 토해냈다. 차창이 박살나고 차체가 부서졌다. 그러나 2천여명으로 불어난 관중들은 버스를 때려 부수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않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1986년 10월 22일 한국시리즈 3차전 대구경기에서 해태에게 삼성이 역전패를 당하자 흥분한 관중들이 해태전용버스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1차전의 패배를 관중들이 던진 병에 투수 진동한이 머리를 다친 탓으로 여긴 것이다


경찰들이 달려왔지만 관중들은 버스가 완전히 전소될 때까지 농성을 벌였다. 버스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었다. 경기장 안 주차장에 서 있던 승용차들도 차창이 깨지고 차체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행인 것은 인명 피해가 없었던 점이다. 그러나 겁에 질린 해태 선수들은 1시간이 넘도록 경기장에 갇혀 있다가 관중들이 해산한 뒤 조심스럽게 빠져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대구 관중들의 난동은 버스 한 대를 태운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4차전 속행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해태 측은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는 도저히 경기를 속행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10월 22일 밤 한국야구위원회는 긴급대책회의를 소집, 한국시리즈 속행을 결정했다. 이어 10월 23일 오전에는 대구시 치안 당국자와 연석회의 끝에 경기를 치르기로 결정을 보아 4차전은 예정대로 열리게 됐다. 그러나 대구 관중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평소보다 4배 이상 증가된 경찰 병력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 경기를 지켜 보아야 했다.

해태 버스를 불태운 이후 대구 관중들의 관전 태도는 모범적일 만큼 성숙된 분위기를 유도해 나갔다. 하지만 삼성라이온즈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상대 팀에게 패하자 격려 차원을 넘어 울분을 터트렸고 끝내는 난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난장판이 된 대구구장 모습.

대구 관중 난동

해태 버스를 불태운 이후 대구 관중들의 관전 태도는 모범적일 만큼 성숙된 분위기를 유도해 나갔다. 하지만 삼성라이온즈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상대 팀에게 패하자 격려 차원을 넘어 울분을 터트렸고 끝내는 난동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 5월 29일 대구에서 벌어진 해태전이다. 강타자 이만수가 제 몫을 못하자 빈 깡통을 던지며 울분을 터트린 것이다. 관중들은 7회 초까지 해태가 득점할 때마다 깡통을 던지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다 7회말 한방을 기대했던 이만수가 투수 앞 땅볼로 맥없이 물러나자 덕 아웃으로 들어가던 그에게 깡통 세례를 퍼부었다. 피할 사이도 없이 깡통에 얻어맞자 화가 치민 이만수는 깡통을 집어 3루 측 관중석을 향해 집어던진 것이다. 관중들은 이를 신호로 욕설을 퍼부으며 깡통이든 뭐든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경기장으로 내던져 경기가 5분간 중단되기도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정동진 감독은 이만수와 함께 그라운드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정중하게 사과하며 관중들의 흥분을 진정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동으로 경기가 끝난 뒤에도 관중들이 흩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300여명의 관중들이 끝까지 남아 이만수를 성토하며 관중석 의자 700여석을 파손하고 불태워 경찰이 최루탄 10여 발을 쏘아 성난 관중들을 해산시키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만수는 관중들의 난동을 촉발시킨 행동에 책임을 물어 5월 30일 구단으로부터 벌금 100만원과 무기한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다. 선수가 시비거리를 제공해 관중들이 난동을 부린 사건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1999년 10월 20일 대구에서 벌어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롯데의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가 물병과 오물을 던지며 야유하는 관중들을 향해 방망이를 집어던져 23분간 경기가 중단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사건의 발단은 6회 초였다. 삼성에게 0-2로 끌려가던 롯데의 호세가 중월 솔로 홈런을 터트린 뒤 3루 베이스를 도는 순간 3루쪽 관중석에서 물병을 내던지며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호세는 자신의 홈런으로 1점을 따라붙은 것에 만족,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하지만 덕 아웃으로 들어가던 호세는 헬멧을 벗어 1루쪽 관중석을 향해 던질 듯한 자세를 취해 관중들을 흥분시켰다. 관중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맥주 캔과 물병이 호세를 향해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관중이 던진 계란에 급소를 맞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호세는 관중석을 향해 방망이를 집어던졌다.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관중 한 명이 호세가 던진 방망이에 얻어맞아 부상까지 당하자 롯데 덕 아웃으로 각종 오물과 물병을 집어 던지며 호세를 성토하고 나왔다. 롯데 선수들이라고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관중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맞대응하고 나섰다. 하지만 임채섭 주심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호세를 퇴장시켰다. 야규규칙 4조 6항 A조 2번 ‘관중들에게 폭언을 행한 선수는 퇴장시킨다’는 조항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임 주심의 이런 조치에 롯데 선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경기를 치를 수 없다며 짐을 싸 철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심판들의 설득으로 경기는 23분 뒤 가까스로 속개됐다. 그러나 삼성이 5 - 6으로 역전패를 당한 가운데 경기가 끝나자 격분한 일부 관중들이 이번에는 경기장 밖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순찰 차량을 부수고 이를 말리는 경찰관까지 폭행, 10여명이 북부경찰서로 연행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원조는 1988년 9월 13일 선수 142명이 대전 유성관광호텔에 모여 결성한 한국프로선수협의회다. 당시 선수회는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씨가 후견인이 되어 은밀하게 추진됐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최동원.

선수회 파동

프로야구 사상 선수와 구단이 극과 극으로 치닫는 갈등의 원인이 됐던 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2000년 1월 22일 새벽 1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삼성과 현대 선수들이 퇴장한 가운데 창립 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1988년 제1차 선수회 출범이 그러했듯 이를 저지하려는 구단 측과 만만찮은 마찰을 빚었다. 프로야구선수협의회는 1월 22일 새벽에 열린 창립 총회에서 송진우(한화)를 회장으로 선임하면서 순탄하게 출범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월 22일 긴급 이사회를 소집, 창립 총회 발기인 전원에 대해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할 것을 결의하면서 ‘제1차 선수협 파동’이 시작됐다. 이 파동은 3월 10일 문화관광부가 중재에 나서 KBO 및 구단, 선수협 간의 3자 회동을 갖고 ① 선수협의회는 시즌 종료 후 결성한다, ② 선수협 집행부는 시즌 종료 후 선출된 각 구단의 선수대표로 한다, ③ 현재의 선수협 소속 선수는 시즌 중 선수협 활동을 중지, 소속 팀에 복귀해 야구활동을 한다, ④ 구단 및 KBO는 현 선수협 소속 선수에게 일체의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한다는 등의 5개항에 합의하고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2000 시즌이 끝난 12월 18일 선수협 집행부가 28명의 선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재결성을 시도, 구단 측이 강력하게 저지에 나섬으로써 ‘제2차 선수회 파동’이 시작됐다.

12월 30일 KBO와 8개 구단이 선수협 집행부 주동자 6명(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최태원)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함으로써 분쟁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져 나갔다. 이에 격앙된 LG, 해태, SK, 롯데, 한화, 두산 선수들이 집단으로 선수협에 가입, 정면 대결에 나섰고 이에 맞선 구단측은 12월 26일 이사회를 열어 ‘사태 미해결 시 시즌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선수협 파동은 해를 넘긴 2001년에도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승엽은 1월 4일 그 동안 관망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개인 자격으로 선수협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풀릴 것 같지 않던 선수협 파동은 1월 20일 문화관광부의 중재로 어렵게 타결을 보아 파국을 면하게 됐다.

1월 20일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의 주재로 장관실에서 회동한 구단 측과 선수협 측은 ①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6명에 대한 방출 철회 및 선수협 참여 선수에 대한 불이익 배제, ② 선수협 구성 인원은 KBO에 등록된 야구선수 전원을 원칙으로 하되 선수 본인의 의사에 따라 불참 가능, ③ 2000년 12월 18일 구성된 선수협 집행부는 합의와 즉시 사퇴, 8개 구단 선수들이 재선출한 선수대표로 2001년 1월까지 재구성, ④ 선수협 사무국은 신 집행부에서 구성하기로 하는 등 5개항에 합의를 보아 사태를 매듭짓게 됐다.


◎ 1988년 선수회 대의원 명단 ◎
구단 위원장 대의원
해태 김종모 김성한  이상윤  선동열  장채근  이순철
삼성 박승호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  오대석  김성래
태평양 김일권 김바위  정진호  김윤환  양상문  김동기
OB 김광수 김경문  박종훈  양세종  김진욱  신경식
MBC 신언호 김상훈  유종겸  오영일  김용수  박흥식
롯데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빙그레 유승안 김한근  이상군  이강돈  강정길  김성갑

프로야구선수협의회의 원조는 1988년 9월 13일 선수 142명이 대전 유성관광호텔에 모여 결성한 한국프로선수협의회다. 이 당시 선수회는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崔允植)씨가 후견인이 되어 은밀하게 추진됐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월 10일 최동원이 선수들에게 선수회 결성에 대한 안내문을 발송하면서였다. 선수회 구성 목적은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경조사와 회원의 이익을 위해 공동으로 참여하며 연금제도를 개발하여 은퇴한 회원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고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창립 총회는 예정대로 1988년 9월 13일 오후 2시에 열렸다. 초대 회장으로 최동원이 선출됐다. 각 팀에서 1명씩 7명이 입후보한 회장 선출 투표에서 56표를 얻어 당선된 것이다. 부회장은 MBC의 이광은(李光殷), 감사는 OB의 계형철과 해태의 서정환이 선출됐다. 또한 7개 구단별로 위원장과 대의원까지 선출, 첫 출발부터 빈틈 없는 조직을 구성한 뒤 대의원 총회는 9월 30일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열기로 했다.(1988년 선수회 대의원 명단 참조) 하지만 이날 선수회 결성 취지를 설명한 최윤식씨는 “앞으로 선수회를 노동조합 성격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밝혀 선수들의 찬성을 이끌어 냈지만 구단들을 긴장시켰다. 친목 단체로서의 선수회 결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구단들은 노동조합 활동에 편승할 움직임을 보이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국내 프로야구의 시장 규모로 보아 시기상조인 데다 선수회가 결성될 경우 혼란만 가중될 우려가 있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7개 구단 사장들은 9월 22일과 23일 사장단회의를 열고 9월 30일로 예정된 대의원 총회에 참석하는 선수들과는 연봉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 선수회비 납부자와도 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재계약을 못한 선수는 타 구단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뒤 해당 선수들에게 서면으로 통보했다. 사장들의 엄포성 결의안은 즉각 약효를 발휘했다.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열기로 한 대의원 총회는 계룡산 동학사 앞 서울식당으로 장소를 바꿔 OB, MBC, 롯데 등 3개 구단 대의원과 빙그레 유승안 등 20명만이 참석,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삼성, 해태, 태평양, 빙그레 대의원들이 구단의 끈질긴 설득으로 참석을 포기했던 것이다.

4개 구단 대의원들의 불참으로 선수회 결성이 무산됐지만 후유증도 컸다. 사장단회의 결의 사항을 통고 받고도 아랑곳 없이 대의원총회에 참석한 4개 구단 선수들을 ‘지시 불이행자’로 간주, 10월 6일 실행이사회에서 퇴출하기로 결정해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사장단회의에서 결의한 사항을 적극 추진키로 다시 한번 결의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 야구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희박했다. MBC는 없었던 일로 넘겨 버렸다. 롯데와 OB는 각서를 제출받는 선에서 선수회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1996년 6월 2일 인천 현대전에서 빈볼 시비 끝에 두 팀 선수들이 주먹다짐을 벌였다. 공에 옆구리를 맞은 이승엽이 그라운드에 엎드려 있다.

빈볼 시비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빈볼이었다. 감독이나 코치가 의도적으로 지시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 투수 자신이 알아서 던졌다. 빈볼에 관한 한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張明夫)를 따라 갈 선수는 없었다. 장명부는 위기에 몰릴 때마다 교묘하게 빈볼을 던져 타자의 얼을 빼놓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너구리’였다. 삼성 선수들도 알게 모르게 여러 차례 장명부에게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시비로 번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장명부가 은퇴한 한참 뒤인 1990년 6월 5일 잠실에서 벌어진 OB와의 연속경기 1차전에서 빈볼 시비 끝에 집단 패싸움으로 번진 일이 발생했다.

집단 패싸움의 발단은 OB의 5번째 투수로 등판한 김진규(金鎭圭)가 7회 초 선두 강기웅(姜起雄)에게 빈볼에 가까운 초구를 던지면서 시작됐다. 강기웅이 “무슨 놈의 야구를 이 따위로 하느냐”고 중얼대자 이를 들은 포수 조범현(曺凡鉉)이 발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OB는 5월 31일 대구경기에서 3-20으로 패한 뒤 이날 경기에서도 4-9로 끌려가고 있어 모두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진규가 던진 2구가 강기웅의 왼쪽 허벅지로 파고 들었다. 강기웅이 참지를 못하고 배트를 움켜쥔 채 김진규에게 달려갔다. 양 팀 벤치의 선수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벌떼처럼 몰려 나가 엉겨 붙었다. 이 와중에서 싸움을 뜯어말리던 김동앙(金東昻) 주심마저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경기는 22분 가량 중단됐다. 삼성 선수들 가운데 강기웅을 비롯한 김종갑, 박정환이 퇴장을 당했고 OB에서는 김진규, 조범현, 김태형이 쫓겨났다. 그러나 이 패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상벌위원회를 소집, 싸움의 원인 제공자인 강기웅과 김진규에게는 10경기 출전 금지에 제재금 100만원, 싸움에 가담한 박정환, 김종갑 및 OB의 조범현, 김태형에게는 30만원씩 벌금을 물렸다.

잠잠하던 빈볼 시비가 다시 불붙은 것은 1996년 6월 2일 인천 현대전에서였다. 두 팀 선수들 40여명이 그라운드에서 뒤엉켜 5분간 주먹다짐을 벌이는 최악의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현대의 정명원(鄭明源)이 7-1로 리드하고 있던 9회초 1사 후 양준혁에게 빈볼을 던지자 삼성 선수들은 물론 현대의 선수들까지 마운드로 몰려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야기했다. 그러나 큰 충돌 없이 잠잠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정명원이 이번에는 제2구를 이승엽의 왼쪽 옆구리에 맞혔다. 이를 지켜본 삼성 선수들이 마운드로 몰려나가 정명원을 에워싸자 현대 선수들도 뛰쳐나와 40여명의 선수들이 5분 가량 주먹다짐을 벌여 몇 명이 가벼운 타박상을 입기도 했다. 사건의 심각성을 간파한 이규석 주심은 빈볼을 던진 정명원에게 즉각 퇴장을 명해 간신히 수습했으나 정명원의 볼에 옆구리를 맞은 이승엽은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그라운드에 쓰러져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다행히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으나 삼성과 현대 선수들은 이 일로 견원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6월 17일 한국야구위원회에서 두 팀의 당사자들이 만났다. 백인천 감독을 비롯해 현대 김재박 감독 및 두 팀의 주장들인 이종두, 김경기(현대)와 빈볼 시비의 당사자인 양준혁, 이승엽, 정명원이 만나 앙금을 풀었다. 프로야구 사상 빈볼 시비로 화해의 자리가 마련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98년 5월 17일 인천에서 벌어진 현대와의 연속경기 1차전에서 또 다시 빈볼 시비가 불거진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빈볼. 그럼에도 시비로 번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1990년 6월 5일 잠실에서 벌어진 OB와의 연속경기 1차전에서 빈볼 시비 끝에 집단 패싸움으로 번진 일이 발생했다.


이 경기에서는 집단 패싸움 같은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서정환 감독이 선수들을 철수시키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시비의 발단은 현대가 5-2로 리드하던 4회 말 무사 1, 2루에서 외국인 용병 쿨바가 타석에 들어선 뒤 일어났다.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한 최창양의 초구가 쿨바의 얼굴 앞으로 스치듯 지나간 게 문제였다. 깜짝 놀란 쿨바는 배터 박스를 가까스로 벗어나며 볼을 피했 다. 두 번째로 던진 볼도 비슷한 코스로 들어가자 황석중 3루심이 마운드로 올라가 최창양에게 경고를 주었다.
이 때였다. 벤치에서 이를 지켜보던 서정환 감독이 그라운드로 걸어 나와 어필을 했다.
“그게 어떻게 빈볼이냐? 그리고 지금이 빈볼을 던질 상황이냐? 앞선 2번 타자 타석 때는 포수 머리 위로 날아가는 폭투로 점수를 내줄 만큼 컨트롤이 안됐다. 지금도 그 때처럼 컨트롤이 안됐을 뿐”이라며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항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정환 감독은 수비 중인 선수들에게 철수할 것을 지시, 6분 가량 경기가 중단됐으나 심판들의 설득으로 속행됐다.

부정 배트 시비 사건은 1997년 5월 3일부터 5월 5일까지 대구경기에서 LG가 3연패를 당하자 천보성 감독이 심판실을 찾아가 “삼성 선수들이 사용한 방망이가 부정 배트 같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 결국 이 사건은 40여일의 검사와 조사 끝에 무혐의로 판정났다.

부정 배트 시비

부정 배트 시비 사건은 1997년 5월 3일부터 5월 5일까지 대구경기에서 LG가 3연패를 당하자 천보성 감독이 심판실을 찾아가 “삼성 선수들이 사용한 방망이가 부정 배트 같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 결국 40여일의 검사와 조사 끝에 무혐의로 판정이 났다. 하지만 패배의 결과를 부정 배트로 몰고 간 한 감독의 무책임한 말 한 마디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의 검사기관까지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LG 천보성 감독의 부정 배트 의혹 제기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천보성 감독이 놀란 것은 5월 3일 대구에서 벌어진 삼성과의 첫 경기에서였다. 3-9로 패했다. 그것도 투수 5명을 투입한 끝에 가까스로 진정시킨 점수였다. 하지만 5월 4일 삼성전에서는 까무러칠 일이 벌어졌다. 5-27이라는 엄청난 스코어로 패한 것이다. 천보성 감독은 이 경기에서도 삼성의 타력을 잠재우기 위해 4명의 투수를 연달아 마운드에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삼성 선수들이 휘두르는 배트는 마치 쇠몽둥이 같았다. 때려도 그렇게 때릴 수는 없었다. 1회부터 정경배가 사상 초유의 연타석 만루홈런(1, 2회)을 날리지를 않나 최익성, 류중일, 김태균(2), 이승엽, 김영진 등 6명의 타자들이 홈런만 9방을 터트렸다. 또 2루타도 양준혁(2개), 신동주(2개), 이승엽(3개)이 7개를 터트려 한 경기에서 장타를 16개나 쏟아놓는 파괴력을 과시했다. 5월 5일 경기에서도 삼성의 방망이는 식을 줄을 몰랐다. 삼성의 타선을 잠재우기 위해 김용수를 선발로 7명의 투수를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승엽(2개), 김한수(2개), 신동주에게 홈런 5개를 허용한 끝에 1-13으로 패했다. LG는 대구 3연전에서 홈런 17개를 허용한 끝에 49점을 잃었다. 패해도 이토록 참혹하게 패할 수는 없었다. 상식의 선을 넘어선 홈런이요 실점이었다. 때문에 LG 천보성 감독의 부정 배트 의혹 제기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야구를 시작한 이후 그토록 엄청난 파괴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천보성 감독의 ‘부정 배트 의혹 제기’로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백인천 감독이었다. 문제의 방망이를 선택한 장본인일 뿐더러 1990년 LG 감독 시절에도 압축 배트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 감독은 당당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배트일 뿐 부정 배트는 절대 아니다. 만일 압축 배트가 맞다면 내가 유니폼을 벗겠다”며 부정 배트가 아님을 거듭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천보성 감독도 물러서지 않았다. 첫째 삼성 배트는 일본야구기구(JBO)의 공인 인(印)과 공인 등록 번호가 찍히지 않아 KBO 규약상 부정 배트이며, 둘째 북미산 물푸레나무인 화이트애시가 원목인 삼성 배트의 표면이 일본 홋카이도산 물푸레나무(아오타모)처럼 조밀해 일본에서 제작하여 공수된 반 압축 배트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5월 6일 오전 삼성이 사용한 두 자루의 배트를 수거, 서울 양재동의 한 목공소에서 절단해 검사한 뒤 “원목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압축 등으로 인한 변형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며 부정 배트에 대한 의혹을 일단락지었다. 또 이날 광주에 내려온 황석중 심판위원장은 삼성-해태전에 앞서 일반 배트와 문제의 배트를 자른 단면을 비교하며 압축 배트가 아님을 삼성, 해태 관계자 및 취재 기자들에게 확인시켰다. 일반 배트의 경우 나이테의 간격이 2~3mm로 촘촘한 반면, 삼성 선수들이 사용한 미제 미즈노 배트는 일반 배트보다 나이테의 간격이 2~3cm로 훨씬 넓었다. 하지만 부정 배트 시비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LG구단이 KBO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삼성이 사용하고 있는 미제 미즈노 배트에는 루이빌 슬러거 등 미제 방망이에 찍혀 있어야 할 모델 번호가 없으며 KBO가 압축 방망이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냈지만 전문성이 없으므로 문제의 방망이를 일본에 보내 JBO의 소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0여일의 검사 결과 ‘이상 없음’으로 판정난 부정배트 시비 사건은 삼성의 막강한 타력에 혼비백산한 LG 천보성 감독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LG는 5월 3일부터 시작된 대구 3연전에서 홈런 17개를 허용한 끝에 무려 49점을 잃은 것이다.


KBO는 이에 따라 5월 9일 이상일(李相日) 운영부장과 조희준(趙熙俊) 기획조사부 대리를 일본 미즈노사로 보내 성분 분석을 의뢰, 5월 12일 미즈노사로부터 받아온 검사 결과를 토대로 “삼성이 사용하고 있는 배트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적인 배트”라고 발표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도덕성을 의심 받아온 삼성구단과 백인천 감독은 이를 근거로 LG에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문제의 발언을 한 천보성 감독이 “배트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압축배트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한 뒤 “8개 구단 전체가 사용하면 문제될 게 없지만 삼성만 그 배트를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해 부정 배트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진의와 도덕성을 의심케 했다. 부정 배트 시비는 5월 19일 KBO가 배트의 공인 규정을 보완하기 위해 소집한 규칙위원회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규칙위원들은 미즈노사의 검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미즈노 제품을 미즈노사가 부정품으로 판정하겠느냐”며 신빙성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 것이다. KBO까지 의심을 받게 되자 5월 24일 박현식(朴賢植) 규칙위원장과 이상일 운영부장을 미국으로 보냈다. 문제의 방망이가 미국산임을 감안, 배트를 제작한 공장과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검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일본 미즈노사의 발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도료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브라운대 생체공학연구소에서 도료검사까지 받았다. 6월 16일 통보 받은 검사 결과는 ‘이상 무’였다. 한마디로 말해 부정 배트 소동은 삼성의 막강한 타력에 혼비백산한 LG 천보성 감독의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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