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라이온즈21 | 4장 이승엽의 탄생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프롤로그

한국 프로야구를 빛낸 가장 위대한 타자는 누구일까? 아무래도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이승엽(李承燁)일 것 같다. 이승엽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숱한 타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수놓으며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엽처럼 전 국민의 환호와 갈채를 한 몸에 받은 타자는 없었다. 1999년 이승엽이 기록한 홈런 54개가 그를 국민타자로 만든 것이었다.

1982년 최고의 타자는 MBC청룡의 감독 겸 선수였던 백인천(白仁天)이다. 일본 프로야구 긴데스(近鐵) 버팔로즈에서 은퇴한 뒤 귀국한 백인천은 MBC의 지명타자로 타율 0.412라는 놀라운 성적을 달성,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백인천은 1983년 개인신상의 문제로 MBC를 사퇴, 삼미슈퍼스타즈에서 2년을 더 뛰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1984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은퇴했다.

1983년에는 기라성 같은 타자들이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수퍼 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돋보인 타자는 단연 이만수였다. 타율은 0.294로 타격 8위에 그쳤지만 홈런 27, 타점 74, 승리타점 13으로 3관왕에 올라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그러나 ‘타격의 달인’ 장효조(張孝祚)를 비롯해 해태의 김봉연(金奉淵)과 김성한(金城漢)도 무시할 수 없는 타자들이었다. 장효조는 1983 시즌 타격 1위(0.369)로 인지도를 높였고 1982 시즌 22개의 홈런을 날려 첫 홈런왕의 영광을 안았던 김봉연, 첫 타점왕이었던 김성한도 무한한 잠재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만수의 기세는 해가 거듭될 수록 더욱 거세어져 1984년 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트리플 크라운(타율, 타점, 홈런부문 1위)에 오르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기도 했다. 이만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85년 또 다시 홈런(22), 타점(87)에서 타이틀을 쟁취, 두 개 부문에서 3년 연속 왕위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장효조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1985년부터였다. 타율 0.373으로 타격 1위에 오른 장효조는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격왕을 거머쥐어 프로 데뷔 5년 만에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특히 장효조는 출루율 부문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 1983년 첫 타이틀을 차지한 후 1987년까지 5년 연속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주름잡던 장효조의 방망이도 1988년 롯데로 트레이드된 뒤 힘을 잃고 1991년 출루율 1위를 끝으로 1992년 은퇴했다.

1988년 가장 각광을 받은 타자는 해태의 김성한이었다. 프로야구 최초로 홈런 30개를 날린 김성한은 타점(89), 장타율(0.577)까지 석권, 1985년에 이어 두 번째로 MVP에 뽑혀 호남지방 최고의 타자가 됐다. ‘연습생 신화’를 창조한 장종훈(張鍾熏·빙그레)이 주목을 끈 것은 1988년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면서였다. 무명의 연습선수가 유격수 부문 타이틀을 움켜쥐었으니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은 데뷔 5년 만인 1990년이었다. 기라성 같은 타자들을 제치고 홈런왕과 타점왕을 거머쥔 것이다. 또한 1991년에는 홈런 35, 타점 114개를 뽑아 시즌 최다 홈런 및 최다 타점 신기록을 수립함으로써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차지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992년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40홈런을 돌파하며 또 한번 최우수선수에 뽑혀 최고의 절정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장종훈이 기록한 홈런 41개는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 천문학적인 수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종훈의 이 기록도 6년 만에 깨졌다. 1998년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두산)가 42개를 날려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우즈의 기록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1999년 홈런 54개를 날린 ‘국민타자’ 이승엽(李承燁)의 등장으로 그늘 속에 가라앉았다.

데뷔 3년째인 1997년 타율 0.329(3위)에 팀 사상 최다인 3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타점 114점, 안타 170개를 터트려 타격부문 3관왕으로 최우수선수에 선정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9년은 이승엽이 홈런 54개 신기록을 수립, 국민타자로 발돋움하며 야구 역사를 바꾼 해이다. 골든글러브 수상 모습.

삼성입단

“기분이 묘했다. 내가 대견스러우면서도 슬픔 같은 것이 밀려왔다. 박철순 선배는 어릴 때 나의 우상이었는데 내가 홈런을 터트리다니 정말 죄송스러울 뿐이다.” 1995년 7월 23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OB와의 경기에서 3회 초 박철순의 초구를 강타, 우측 담장을 넘기는 3점 홈런을 터트린 뒤 이승엽이 독백처럼 흘린 말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이승엽은 6살이었다. 어린 이승엽에겐 활달하면서 우아한 폼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는 박철순이 한없이 멋져 보이기만 했다. 이승엽이 훗날 투수가 되어 경북고를 졸업할 때까지 박철순은 우상이기도 했다. 이승엽은 고교 2학년 시절 제48회 청룡기 쟁탈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투수 겸 1루수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 우수투수상까지 수상했다. 경북고 3학년이었던 1984년에는 청소년대표로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제1회 대회 이후 13년 만에 한국에 우승컵을 안긴 수훈선수였다. 이 대회에서 최다 홈런상과 최다 타점상을 받았지만 이승엽의 마음 속엔 박철순 같은 투수가 되는 것이 꿈으로 남아 있었다. 1995년 이승엽은 대투수를 꿈꾸며 계약금 1억3,200만원이라는 고졸선수 최고대우를 받고 입단했다. 그러나 중학시절부터 신통치 않았던 왼쪽 팔꿈치에서 뼈조각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타자로 전향했다. 이승엽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왼손잡이 대형 투수 탄생을 기대했던 구단의 실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기우였다. 타자로 변신한 이승엽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타자’로 태어날 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단지 장래가 촉망되는 타자쯤으로 알았다. 당시 우용득 감독은 “힘을 바탕으로 정교한 타격을 구사하는 장거리 타자로 이만수와 김성래의 뒤를 이을 것 같다.”고 이승엽을 평했다.이를 뒷받침하듯 이승엽은 데뷔 첫 해 1루수 자리를 꿰차며 중심 타자로 121경기에 출전, 타율 0.285를 기록했다. 홈런도 13개, 타점은 73점을 뽑았다. 고교를 갓 졸업한 19살짜리 새내기치고는 놀라운 성적을 낸 것이다.더욱 놀라운 일은 데뷔 3년째로 접어든 1997년에 일어났다. 126경기에서 타율 0.329(3위)를 기록하며 팀 사상 최다인 3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타점도 114점을 뽑았고 안타는 170개를 터트려 타격부문 3관왕으로 최우수선수에 선정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8년에는 홈런 38개를 날리며 타점 102점을 기록했지만 두산의 용병 타이론 우즈에게 밀려 각각 2위에 머물렀다. 타이틀은 장타율(0.621) 1위가 유일했다.

이승엽이 ‘국민타자’로 발돋움하며 야구 역사를 바꾼 것은 1999년이다. 타자로서 완숙기에 접어든 이승엽은 132경기에 출전, 각종 기록을 쏟아놓으며 홈런 54개를 터트려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이승엽이 타이론 우즈가 1998 시즌에 세운 최다 홈런(42개)를 깨고 신기록 행진을 펼치자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98 시즌 263만 9,119명보다 22%가 늘어난 322만 624명이 이승엽의 홈런행진을 지켜봤다. 이해 이승엽은 홈런은 물론 타점(123)과 출루율(0.458) 및 장타율(0.733)에서도 1위를 거머쥐어 2번째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최우수선수의 영광은 2001년과 2002년에 연달아 찾아왔다. 2001시즌 이승엽은 127경기에 출전했지만 타율은 0.276으로 저조했다. 그러나 홈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9개를 날려 타이틀을 또 한번 수상한 뒤 득점 (101)과 장타율(0.605)에서 2위를 차지하며 타점 8위(95), 출루율 9위(0.412)에 올라 개인 통산 3번째로 최우수선수에 등극했다. 2002년 들어 놀라운 것은 이승엽이 메이저급 선수로 성장한 점이다. 2월 21일 애리조나 메사에 스프링 캠프를 차린 시카고 컵스에 합류해 메이저리거와 함께 훈련하며 더욱 성숙한 타자로 변신했다.


2002년 2월 10일부터 약 한달 동안 미국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이승엽이 시카고 컵스 세미 소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승엽은 이 훈련을 통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2월 26일 가진 시카고 컵스의 시범경기에 출전한 이승엽은 2타수 무안타에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3월 4일 샌프란시스코와의 원정 시범경기에서 7회 초 1사 1루에서 115m짜리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공식경기 첫 홈런을 기록한 뒤 3월 5일 벌어진 애너하임전에서는 2점 홈런을 날려 한국 홈런왕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승엽은 비록 짧은 2주간의 훈련이었지만 11타수 3안타 2홈런 5타점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위상을 메이저리그에 널리 알렸다. 2002년 시즌 이승엽은 메이저리그에서 터득한 노하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각종 신기록을 세운 끝에 홈런(47), 타점(126), 득점(123) 및 장타율(0.689) 등 4개 부문에서 왕관을 썼다. 특히 126타점은 1999년 자신이 세운 한 시즌 최다타점을 또다시 갱신한 대단한 기록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다안타(165)와 출루율(0.436)에서 2위, 타격에서 3위(0.323)를 차지해 데뷔 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려 국내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4번째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2002년 11월 14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프로야구 기자단 투표에서 이승엽은 97표 중 76표를 획득, 다승왕 송진우(宋津宇·한화)를 65표 차이로 제치고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런 이승엽은 정작 분발했어야 할 한국시리즈에서 침묵으로 일관,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지켜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었다. 우승을 결정지은 6차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이승엽은 5경기에서 16타수 2안타를 날려 타율 0.125에 3타점이 전부였다. 페넌트레이스에서는 홈런왕이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한방의 홈런도 날리지 못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6차전에서도 9회 마지막 타석에 들어설 때까지 20타수 2안타로 묶여 있었다. 하지만 이승엽은 역시 대스타였다. 6 - 9로 뒤진 9회 말 선두 타자인 9번 김재걸(金在杰)의 2루타와 2번 브리또의 볼넷으로 만들어진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볼 카운트 1 - 0에서 이상훈(李尙勳)의 제2구를 받아쳐 3점 홈런을 만든 것이다. 9 - 9 동점이었다. 결과는 마해영(馬海泳)의 천금 같은 끝내기 홈런으로 10 - 9로 역전승. 21년 만에 우승의 한을 풀었지만 이승엽의 3점 홈런은 지금껏 날린 홈런 중 가장 값진 홈런이었다.

2002년 11월 10일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이 9회말 동점 스리런 홈런을 치고 있다.

홈런 그리고 신기록

이승엽의 프로야구 데뷔전은 1995년 4월 15일 잠실에서 벌어진 LG와의 시즌 개막 경기였다. 9회 초 대타로 출전한 이승엽은 새내기답지 않게 김용수와 맞붙어 첫 안타를 날렸다. 첫 홈런은 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6회 초 이강철(李强喆)의 제4구를 통타한 끝에 뽑은 우월 솔로였다. 첫 안타를 날린 지 17일 만에 뽑은 이 홈런으로 이승엽은 전문가들로부터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새내기”로 주목을 받았다. 이에 부응하듯 1997년 홈런(32), 타점(114), 안타(170) 부문에서 왕위를 차지, 최연소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때 나이 21살이었다. 1998년 허리 부상의 와중에서도 4경기 연속홈런(6월 21∼27일)을 기록하며 6월에 13개의 홈런을 날려 1991년 8월 장종훈(張鍾熏)과 1997년 8월 박재홍(朴栽弘)이 기록한 월간 최다 홈런(종전12)을 경신했다. 1999년은 이승엽이 프로야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해였다. 4월 8일 쌍방울전(전주)에서 시즌 첫 홈런(솔로)을 뽑은 이후 9월 30일 광주 해태전에 이르기까지 5개월 22일 동안 54개의 홈런을 터트려 프로야구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다타점(123), 최다득점(128), 최다루타(356), 최다사사구(124), 최다출루(281), 최다장타(89)까지 일시에 갈아치웠다. 5월로 접어들어 홈런 행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이승엽은 5월 5일 현대전(대구)에서 최연소(22살 8개월 16일. 종전 한화 장종훈=23살 5개월 4일)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다. 또 5월 19일 한화전(대전)에서는 3개의 홈런을 포함, 5안타를 터트려 시즌 최소경기(59경기) 20홈런 고지에 오르며 경기 최다 루타 타이(14)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5월 한 달간 15개의 홈런을 터트려 1998년 6월 자신이 세운 월간 최다 홈런(13)을 갈아치우며 최소 경기 30홈런에 불을 붙였다.

이승엽의 시즌 최소 경기 30홈런은 6월 23일 LG전(대구)에서 터졌다. 64경기 만에 터진 것이다. 1998년 7월 18일 쌍방울전(전주)에서 자신이 세운 최소 경기(78)를 14경기나 앞당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7월 23일 한화전(대전)에서 최소경기(92) 최소타석(428) 최소타수(341)로 40홈런을 날려 프로야구에 ‘이승엽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프로야구가 이승엽 행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40홈런을 달성한 이틀 뒤 팀 동료인 찰스 스미스와 함께 사상 최초로 6경기 연속홈런(7월 19∼25일)을 기록해 1998 시즌 타이론 우즈(두산)가 세운 시즌 최다 홈런(42)을 따라잡자 온 국민의 관심은 이승엽의 홈런에 쏠렸다. 구단이 마련한 ‘이승엽 홈런 신기록 축하 이벤트’는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프로야구 최다 홈런(43) 신기록은 8월 2일 대구 롯데전에서 터졌다. 홈런 볼이 포물선을 그리며 우중간 담장을 넘어 열광하는 관중 속으로 날아가자 43발의 축포가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기도 했다. 이승엽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그러나 43홈런은 아시아 신기록 도전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했다. 9월 2일 대구 LG전에서 전인미답인 50홈런의 신천지를 개척한 이승엽은 1964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왕정치(王貞治)가 수립한 아시아 최고기록(홈런 55)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월 7일 대구 한화전에서 52홈런을 날린 뒤 국가대표 선수로 제1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9월 11∼17일 잠실)에 출전하며 페이스를 잃어 버렸고 53호 홈런은 9월 19일(대구 쌍방울전)에 기록했다. 시즌 4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날린 것이다. 대망의 54홈런은 9월 30일 광주(해태전)에서 투런으로 장식했다. 남은 경기는 3경기. 하지만 국민적 열망을 뒤로 한 채 침묵을 지켜 더욱 아쉬움을 남겼다.


프로야구 최다 홈런(43) 신기록은 1999년 8월 2일 대구 롯데전에서 터졌다. 홈런 볼이 포물선을 그리며 우중간 담장을 넘어 열광하는 관중 속으로 날아가자 43발의 축포가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았다.

이승엽의 기록 행진은 2000년에도 계속됐다. 4월 19일 인천 SK전에서 최연소 및 최소경기로 개인 통산 150홈런 및 500타점의 고지에 올랐다. 이승엽은 4회 초 가내영(賈來映)의 5구를 통타, 우측 스탠드 상단에 떨어지는 시즌 4호 홈런을 날려 639경기 만에 최연소(23년 8개월 1일) 150홈런과 500타점을 동시에 달성한 것이다. 종전까지 최연소 기록은 한화 장종훈(25년 3개월 27일), 최소 경기는 이만수(655경기)가 갖고 있었다. 또한 6월 24일에는 대전 한화전에서 한용덕(韓容悳)으로부터 홈런을 뽑아 1,503루타를 달성, 최연소(23년 10개월 6일) 및 최소 경기(692)로 1,500루타를 돌파했다. 이어 6월 29일 SK전(대구)에서도 1회 초 솔로 홈런으로 최연소 500득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0 시즌 이승엽은 안타 133개, 홈런 33개, 타점 96점에 그쳐 이 해 새로 신설된 최다 득점(109) 타이틀만 차지했다. 프로 데뷔 7년째를 맞이한 2001년 이승엽은 1999 시즌에 미완성으로 남긴 55홈런의 숙제를 풀기 위해 또 한번 결의를 다졌다. 4월 29일 수원 현대전에서 사상 최연소(24년 8개월 11일)로 600타점을 달성한 이승엽은 6월 21일 대구 경기(한화전)에서 최연소(24년 10개월 3일) 및 최소경기(815) 200홈런 고지를 정복했다. 뿐만 아니라 8월 17일에는 대구 경기(한화전)에서 3회 말 솔로 홈런을 날려 매니 마르티네스, 카를로스 바에르가, 마해영과 함께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연속타자 홈런을 뽑아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55홈런의 벽은 높고 험했다. 홈런 39개를 날려 홈런왕 타이틀을 되찾는 것으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2002년에는 47개의 홈런을 날려 54개의 홈런이 얼마나 큰 기록인가를 실감나게 했다. 2002 시즌에서도 이승엽은 수없이 많은 기록을 쏟아냈다. 4월 27일 광주에서 벌어진 기아전에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날린 뒤 4월 28일 기아전 5회초 밀어내기 사구로 최연소(25년 8개월 10일) 및 최소경기(900경기) 700타점을 달성했다. 5월 16일 대구에서 벌어진 롯데와의 연속경기 1, 2차전에서 홈런 2방을 터트려 9루타를 기록, 최연소(25년 8개월 27일) 및 최소경기(915경기) 2,000루타를 돌파했다. 이어 6월 9일 대구 기아전에서는 프로 첫 6년 연속 20홈런을 날린 뒤 7월 26일 두산전(대구) 7회 말 이혜천의 볼을 강타, 좌월 솔로 홈런으로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6년 연속 30홈런을 달성했다.

이보다 3일 전인 7월 23일 대구 현대전에서 최연소(25년 11개월) 및 최소 경기(959경기) 250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250홈런은 1996년 이만수(李萬洙·삼성)와 1999년 장종훈(張鍾熏·한화)만이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최소 경기를 기록한 장종훈이 1,339경기만에 달성한 것인 데 반해 이승엽은 이보다 무려 380경기나 앞서 기록을 작성했다.이외에도 이승엽은 6월 21일 대구 롯데전에서 최연소(25년 10개월 3일) 및 최소 경기(941경기) 700득점을 달성했고 8월 23일에는 부산 롯데전에서 자신이 104경기 만에 100타점을 달성한 최소 경기를 98경기로 단축시켜 신기록 제조기를 방불케 했다.

1997 시즌 이후 불우 이웃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온 이승엽. 삼성홈플러스 협찬으로 대구경기에서 홈런을 칠 때마다 쌀 한 가마니를 비축해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했다.

사랑의 홈런 행진

프로야구 역사상 이승엽만큼 짧은 시간에 대스타로 성장,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숱한 화제를 뿌린 선수도 드물다. 특히 1997년 최다 홈런(32), 최다 타점(114), 최다 안타(170)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자 이승엽은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다. 이해 이승엽은 방송과 스포츠신문사가 실시한 주·월간 및 연말 우수선수에 14차례나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로 인해 부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승용차 및 각종 시상금으로 연봉(6,500만원)에 버금가는 상금을 챙겼다. 그러나 이승엽은 이를 움켜쥐고 있지 않았다.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승엽의 불우 이웃 돕기 첫 테이프는 1997 시즌이 끝난 연말, 자신이 거주하는 대구시 동인동에서 끊었다. 한 동네에 사는 불우한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해 장학금을 선뜻 내놓아 훈훈한 마음을 전했다. 이승엽의 불우 이웃 돕기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8년 이승엽은 구단의 이벤트 행사인 ‘사랑의 쌀 보내기 홈런 퍼레이드’와 삼성전자 후원인 ‘결식아동 돕기 사랑의 홈런 퍼레이드’에 참가, 수상 상금을 불우 이웃을 돕는 데 내놓기도 했다. 특히 ‘삼성 마이마이와 함께하는 결식 아동 돕기 사랑의 홈런 퍼레이드’는 이승엽의 야심찬 이벤트이기도 했다. 성금도 내고 1992 시즌 장종훈이 세운 시즌 최다홈런(41개) 기록까지 경신한다는 각오였다.

이승엽은 자신의 배번과 같은 36호 홈런부터 매 홈런이 터질 때마다 결식 아동 100명이 식사할 수 있는 성금을 한국복지재단에 기탁했다. 또, 11월 30일 서울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일간스포츠의 001연간 3상 시상식에서 기능상 상금 300만원을 결식 아동들을 위해 내놓기도 했다. 1999년에도 ‘사랑 나누기’ 행사에 동참, 홈런 1개당 5만원의 성금을 기탁한 이승엽은 시즌이 끝난 10월 2일 대구시가 주관한 ‘달구벌 축제’에서 자랑스런 대구시민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여기서도 이승엽은 상금으로 받은 1천만원을 전액 불우 이웃돕기 기금으로 기증했다. 대구시민이 주는 상금을 헛되이 쓰지 않기 위해 부친 고향(전남 강진)에서 쌀을 구입, 대구 시내 불우 이웃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영호남 화합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2000년 4월 6일에는 1999 시즌에서 달성한 50홈런의 상금 2,000만원 중 1,000만원을 사회복지기금으로 내놓았다. 1,000만원의 기금 중 500만원은 자신이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대구시장애인시설협회(회장 강영신)에, 나머지 500만원은 재활복지시설인 화니재단(이사장 손영미)에 전달했다. 또한 이승엽은 사랑의 홍보대사로 만만찮은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1999년 3월 25일 대구시 장애인복지시설협회 홍보대사를 맡아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앞장서는 한편 소외된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의 활동을 폈다.


1999년 3월 25일 대구시 장애인복지시설협회 홍보대사로 임명된 이승엽은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소외된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사랑의 활동을 폈다.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이하여 각종 행사의 홍보용 포스터 제작에 장애인들과 함께 출연, 보다 많은 이웃들이 장애인 돕기 행사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2000년 1월 10일에는 대구지방검찰청의 요청으로 대구·경북청소년선도위원을 맡아 선도 활동을 폈다. 이승엽은 대구·경북도내 중·고교를 찾아가 자신의 청소년 시절 이야기를 비롯한 건전한 청소년생활에 대한 강의를 했다. 2000년에도 이승엽은 구단이 실시한 ‘사랑 나누기 2000’ 행사에 참가, 홈런 1개를 날릴 때마다 10만원의 성금을 냈다. 특히 2000년 이승엽은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도 참여, 무주택자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폈다.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은 무주택자를 위해 집을 지어주는 비영리법인인 ‘한국 사랑의 집 짓기 연합회(Habitat for Humanity Korea, 회장 정근모)’가 스포츠 스타로서 최고의 인기와 깨끗한 이미지를 보유한 이승엽에게 홍보대사를 맡기면서였다. 이 운동에 참여한 사회 각계 각층 유명 인사를 통틀어 최초의 홍보대사로 등록된 이승엽은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전 국민에게 홍보하는 한편 프로모션에도 동참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최다홈런 등 타격부문 4관왕에 오르며 통상 4번째 MVP에 등극, 2002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던 이승엽은 2002년 (주)나이키스포츠가 제안한 40호 홈런 달성 격려금을 자신의 고향 대구에 있는 화니복지재단에 쾌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9월 10일 이 선수의 의사를 전해들은 화니복지재단 50여명의 어린이들이 대구구장을 찾아 경기를 응원하고 이승엽 선수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이날 이승엽은 ㈜나이키스포츠와 함께 9월 생일을 맞은 5명의 아동들을 위해 깜짝 생일 선물을 마련해 1년에 한번 제대로 된 외출조차 하기 힘든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승엽 선수의 47호 홈런 달성으로 격려금 800만원을 전달받은 화니복지재단 측은 이를 이동이 힘든 장애 아동들의 바깥세상 나들이를 도울 차량 구입비에 보태겠다고 밝혔다. 한국시리즈를 마치고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일정과 각종 자선행사에 열성을 보인 이승엽은 급기야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홈런을 치고 난 이승엽이 관중석을 향해 인형을 던져주고 있다.

홈런 이벤트

이승엽의 홈런 행진에는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이벤트 외에 팬들을 위한 이벤트가 인기 품목이었다. 1998년 시즌부터 선을 보인 이 이벤트는 1999년 한국 최다 홈런 기록인 타이론 우즈(두산)의 42홈런을 추격하면서 열기가 달아 올랐다. 구단이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뜻에서 삼성전자와 에버랜드 협찬으로 마련한 ‘이승엽 홈런 신기록 기념 1억원대 축하 이벤트’는 내용과 규모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1999년 8월 2일 오후 8시 12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새 지평을 연 날이다. 롯데와의 대구 경기에서 2 - 2 동점이던 5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선 이승엽은 투수 문동환(文東煥)의 초구를 강타,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트려 1998년 두산의 타이론 우즈가 세운 한 시즌 최다 홈런(42개)을 깨고 한국 프로야구의 새 역사를 알리는 찬란한 이정표를 세웠다. 43호 홈런이 터지자 43발의 축포와 함께 이승엽에게는 100돈쭝짜리 황금 배트가 주어졌다. 또 관중들에게는 삼성전자가 제공한 52인치 초대형 프로젝션 TV(500만원 상당)와 서구형 냉장고인 ‘지펠(250만원)’ 및 펜티엄 컴퓨터(200만원 상당), 야구공과 라디오 1,000개가 추첨을 통해 지급됐다. 43호 홈런을 날린 이닝을 맞춘 관중에게도 삼성전자가 제공한 29인치 TV가 주어졌다. 또 42호 홈런 볼을 주운 관중에게는 1999 시즌 잔여 경기 및 2000 시즌 전 경기 입장권이 주어졌고 44호 홈런부터는 캐치상을 신설, 54호 홈런까지 최신형 애니콜 휴대폰 11대가 경품으로 지급되기도 했다. 이승엽의 홈런 이벤트는 홈런 수가 늘어날수록 열기 또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승엽이 8월 8일 대구경기(두산전)에서 49호 홈런을 날리자 유니텔과 국제전화 00755에서 ‘이승엽 50∼55홈런 대축제’를 마련, 50홈런을 날린 이승엽에게는 평생 무료 이용을, 50∼54홈런 볼을 주운 관중에게는 50∼54개월간 유니텔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주었다.

이승엽이 그 누구도 밟지 못한 50홈런 고지에 오른 것은 1999년 9월 2일이었다. 8월 25일 16일간의 긴 침묵을 깨고 49홈런을 날렸던 이승엽은 9월2일 대구 LG전 5회 말 2사 1, 2루에서 방동민(方東民)의 4구를 통타, 좌월 3점 홈런을 터트려 122경기 만에 50홈런을 쏘아 올렸다. 49홈런을 터트린 지 8일 만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 삼성화재가 마련한 ‘이승엽의 골든 볼을 잡아라’를 더욱 빛나게 했다.




1999년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을 기념해 시즌 1호부터 시즌 마지막까지 이승엽의 홈런 사진과 기록이 담긴 홈런 카드를 제작했다.

삼성화재 및 구단 인터넷을 통한 이승엽의 홈런 수 알아 맞추기 이벤트이기도 했던 ‘이승엽의 골든 볼을 잡아라’는 54홈런을 알아 맞춘 관중들에게 시즌이 끝난 뒤 추첨을 통해 1,000만원 상당의 골든 볼(1명)과 200만원 상당의 골든 배트(2명) 및 100만원 상당의 골든 글러브(3명)를 지급했다. 또 응모 관중 전원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이승엽이 사인한 야구배트(100명) 등 모두 4,100명에게 많은 경품이 주어졌다. 삼성상용차도 50홈런부터 삼성 1톤 트럭(시가 800만원)을 내걸어 관중들은 54홈런까지 5대의 트럭을 추첨으로 타가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이승엽의 54호 홈런은 9월 30일 광주 해태전에서 터졌다. 4회초 1사 3루에서 강태원(姜泰遠)의 슬라이더를 받아 쳐 왼쪽 담장을 넘기는 장쾌한 2점 홈런을 기록했다. 129경기 만에 54홈런을 기록했지만 시즌 종료 3경기를 남겨둔 상태여서 1964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왕정치(王貞治)가 세운 아시아 최다 홈런(55개) 경신도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이승엽의 홈런 행진은 아쉽게도 54호에서 끝나 55, 56호 홈런에 걸렸던 경품은 주인을 잃었다. 그러나 50홈런부터 삼성트럭 외에 애니콜 폴더, 에버랜드의 캐리비언 연간 회원권, 유니텔 50∼54개월 무료 이용권, 제일화재의 상금 300만원 등 푸짐한 경품과 상금이 관중들에게 돌아갔다.

7월 1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01 올스타전에서 이승엽이 팬에게 사인해주고 있다.

홈런 신드롬

이승엽은 54호 홈런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찬란한 이정표를 새로 새겼다. 그리고 그의 홈런 행진은 야구장을 외면했던 관중들을 다시 불러 모은 계기가 됐다. 그만큼 이승엽의 홈런은 인기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이승엽의 인기는 야구장에서만 높았던 것은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불러 모았다. 50호 홈런 달성으로 인터넷 통신 유니텔의 평생 이용 혜택을 누리게 된 이승엽이 유니텔에 자신의 아이디(yup 36)를 공개하자 e-mail을 통한 네티즌들의 팬 레터가 쇄도했다. Yup36으로 쌓인 사이버 팬 레터는 하루 300∼500통에 달했고 50호 홈런을 터트린 이후부터는 하루 1,000통이 넘는 메일이 쌓였다. 팬 레터의 내용은 대부분 50호 홈런에 대한 축하와 아시아 신기록에 대한 기대로 채워졌다. 유니텔 아이디 qazlwax(황진우)는 “승엽이 형 50호 홈런 친 것 정말 축하해요. 그 동안 부담 많았죠? 이제 기록 경신에 큰 부담 갖지 말고 평상심으로 경기에 임한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라는 말로 홈런 레이스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엽은 유니텔에서도 전국에 걸쳐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해태 팬이라고 밝힌 ID 다프레(조준영)는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은 꼭 보고 싶다. 상대가 해태가 될지라도. 반드시 신기록을 내길…. 파이팅 이승엽!!”이라는 응원을 보냈고 dkchem(나용주)도 “저는 인천의 한 골수 야구팬 입니다.

바로 현대 팬이죠. 그러나 이승엽씨 팬이기도 하지요. 올해부터….”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요요0902(문요한)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야구를 야구장에 가서 보게 만드시는 이승엽 선수께 존경을 금할 수가 없네요. 정말 요즘엔 모두들 승엽 형님의 방망이에 혈안이죠. 저희 학교에서두 모두들 난리랍니다.”라는 내용을 보내왔고 sangboy(이상)도 “야구에 별 관심이 없던 저도 승엽 씨 덕에 요즘은 야구에 빠져 들고 있다.”고 말해 이승엽의 홈런 행진이 침체된 국내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켰음을 나타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구단은 10월 14일 한길미디어와 손잡고 이승엽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CD-ROM 5만장을 출시했다.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로 제작된 이 CD-ROM에는 현재의 이승엽이 있기까지 그를 지도하고 다듬은 전·현직 코칭스태프와 주변 인물들의 멘트 및 1999년도 주요 경기 장면을 포함한 1,000여장의 사진 자료, 20여편의 동영상, 각종 기록 자료 등과 일반 팬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비밀스런 내용 등을 담았다. 또 54개의 홈런을 동영상으로 다양하게 분석, 이승엽의 홈런 비법까지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1/2000초 연속 촬영 사진 슬라이더, 스크린 세이브 만들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이승엽의 언론 기사 엿보기, 이승엽과 함께 카드 만들기 등 다양한 자료를 공개했다. 시즌이 끝나자 구단은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기념 메달을 제작했다. 기념 메달은 일반 팬들을 위한 황동 재질의 보급형(1만원) 2,000개를 비롯해 기념 주화나 메달을 수집하는 전문가들을 위한 순은제 고급 메달(4만4,000원) 1,000개 등 두 종류로 앞면은 이승엽의 얼굴을, 뒷면에는 이승엽이 홈런 치는 모습과 구단 로고 및 사인 등을 새겨 넣었다.


이승엽 팬클럽 회원들의 응원 모습. 11월 23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02 한국시리즈 우승 시도민 감사대축제 팬사인회 모습.


이승엽은 54호 홈런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찬란한 이정표를 새로 새겼다. 그리고 그의 홈런 행진은 야구장을 외면했던 관중들을 다시 불러 모은 계기가 됐다. 그만큼 이승엽의 홈런은 인기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이승엽의 인기는 야구장에서만 높았던 것은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불러 모았다. 50호 홈런 달성으로 인터넷 통신 유니텔의 평생 이용 혜택을 누리게 된 이승엽이 유니텔에 자신의 아이디(yup 36)를 공개하자 e-mail을 통한 네티즌들의 팬 레터가 쇄도했다. Yup36으로 쌓인 사이버 팬 레터는 하루 300∼500통에 달했고 50호 홈런을 터트린 이후부터는 하루 1,000통이 넘는 메일이 쌓였다. 팬 레터의 내용은 대부분 50호 홈런에 대한 축하와 아시아 신기록에 대한 기대로 채워졌다. 유니텔 아이디 qazlwax(황진우)는 “승엽이 형 50호 홈런 친 것 정말 축하해요. 그 동안 부담 많았죠? 이제 기록 경신에 큰 부담 갖지 말고 평상심으로 경기에 임한다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라는 말로 홈런 레이스에 대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엽은 유니텔에서도 전국에 걸쳐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해태 팬이라고 밝힌 ID 다프레(조준영)는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은 꼭 보고 싶다. 상대가 해태가 될지라도. 반드시 신기록을 내길…. 파이팅 이승엽!!”이라는 응원을 보냈고 dkchem(나용주)도 “저는 인천의 한 골수 야구팬 입니다.

바로 현대 팬이죠. 그러나 이승엽씨 팬이기도 하지요. 올해부터….”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요요0902(문요한)는 “텔레비전으로 보는 야구를 야구장에 가서 보게 만드시는 이승엽 선수께 존경을 금할 수가 없네요. 정말 요즘엔 모두들 승엽 형님의 방망이에 혈안이죠. 저희 학교에서두 모두들 난리랍니다.”라는 내용을 보내왔고 sangboy(이상)도 “야구에 별 관심이 없던 저도 승엽 씨 덕에 요즘은 야구에 빠져 들고 있다.”고 말해 이승엽의 홈런 행진이 침체된 국내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켰음을 나타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구단은 10월 14일 한길미디어와 손잡고 이승엽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CD-ROM 5만장을 출시했다.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로 제작된 이 CD-ROM에는 현재의 이승엽이 있기까지 그를 지도하고 다듬은 전·현직 코칭스태프와 주변 인물들의 멘트 및 1999년도 주요 경기 장면을 포함한 1,000여장의 사진 자료, 20여편의 동영상, 각종 기록 자료 등과 일반 팬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비밀스런 내용 등을 담았다. 또 54개의 홈런을 동영상으로 다양하게 분석, 이승엽의 홈런 비법까지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1/2000초 연속 촬영 사진 슬라이더, 스크린 세이브 만들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이승엽의 언론 기사 엿보기, 이승엽과 함께 카드 만들기 등 다양한 자료를 공개했다. 시즌이 끝나자 구단은 이승엽의 홈런 신기록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기념 메달을 제작했다. 기념 메달은 일반 팬들을 위한 황동 재질의 보급형(1만원) 2,000개를 비롯해 기념 주화나 메달을 수집하는 전문가들을 위한 순은제 고급 메달(4만4,000원) 1,000개 등 두 종류로 앞면은 이승엽의 얼굴을, 뒷면에는 이승엽이 홈런 치는 모습과 구단 로고 및 사인 등을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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