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라이온즈21 | 3장 21년의 스타들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는 팀, 근성있고 호쾌한 야구를 하는 팀!

21년의 스타들

삼성라이온즈가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건희 구단주의 아낌없는 투자와 지원이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그 뒤에는 팀을 갈고 닦아 빛을 내게 한 스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로야구 20여년간 삼성라이온즈를 빛낸 선수들은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권영호, 이선희, 황규봉은 1982년 나란히 15승을 올려 삼성 마운드를 빛낸 주인공들이다.

특히 이선희는 프로야구 개막전과 코리언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만루홈런을 맞아 ‘비운의 투수’가 됐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좌투수였다. 황규봉은 프로야구 첫 구원투수상을 받은 뒤 1984년에는 팀 최초로 승률 1위 투수가 됐다. 황규봉의 뒤를 이어 마무리 투수로 전업한 권영호는 1985년 26세이브를 기록, 구원투수상을 받은 뒤 프로야구 첫 100세이브를 달성한 주인공이 됐다. 오대석이 프로야구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해가 1982년이었다. 또한 서정환은 1982 시즌이 끝나자 트레이드의 첫 테이프를 끊어 해태를 살찌우는 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프로야구 초반 그라운드를 주름잡았던 타자로는 이만수와 장효조를 꼽을 수 있다. 프로야구 원년(1982년) 멤버인 이만수는 1983년 홈런과 타점 및 승리타점으로 공격부문 3관왕에 올라 최우수선수상을 차지, 팀에 첫 MVP의 영광을 선사했다.

1984년에는 타격, 홈런, 타점까지 석권,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의 영광을 차지했다. 1983년에 프로 무대에 선 장효조는 타격왕과 출루율 1위로 천재성을 과시한 뒤 1985년부터 3년 연속 타격왕의 자리를 지켰다. 특히 출루율에서는 천하 무적이었다. 5년 연속 출루율 1위를 차지, 1987년에는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1985년 올스타전에서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투수 김시진은 16연승 기록을 세운 끝에 25승2패10세이브를 기록, 최다승투수상과 승률 1위 투수상을 받았다. 또한 1984년 영입한 재일동포 투수 김일융은 25승6패로 최다승투수상을 수상, 김시진과 함께 통합 우승의 1등 공신이 됐다. 1987년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의 틈을 비집고 홀연히 나타난 선수가 김성래였다. 홈런 22개를 날려 왕위에 오른 김성래는 1988년 유일하게 출루율 1위로 타이틀을 따 팀의 체면을 살렸다. 1989년부터 3년간 삼성은 이렇다 할 스타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 8월 8일 신인 이태일(李太逸)이 롯데전(부산)에서 팀 사상 첫 번째이자 프로 통산 6번째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해 스타 기근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나 이태일은 반짝 스타로 끝났다.

3년간의 침묵을 뚫고 홀연히 떠오른 투수가 오봉옥(吳奉玉)이다. 1992년 38경기에 등판, 13승무패로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승률 100%를 달성한 오봉옥은 최우수승률투수상을 수상, 1987년 김시진(최다승투수) 이후 5년 만에 투수부문 타이틀을 움켜쥐는 감격을 누렸다. 1993년 김성래의 도약도 극적이었다. 무릎 수술의 후유증을 극복, 재기에 성공한 김성래는 홈런 및 타점왕에 올라 최우수선수에 선정돼 불굴의 의지를 드높였다. 또한 양준혁은 신인의 몸으로 타격왕에 오르며 장타율과 출루율에서 1위를 차지, 팀 최초로 신인왕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함께 안았다. 양준혁은 이후 타격왕 2회, 타점왕 1회, 장타율과 출루율에서 각각 1회씩 타이틀을 움켜쥔 뒤 해태로 트레이드됐다. 1995년에는 이동수가 뜻밖의 감격을 안겼다. 꿈나무 육성책의 일환으로 1992년 입단한 이동수가 삼성라이온즈 사상 2번째로 신인왕을 거머쥔 때문이다. 꿈나무 육성은 1989년부터 실시, 1991년 결실을 보아 슬러거 신동주(申東宙·외야수)를 시작으로 최익성(崔益誠 ·외야수), 박석진(朴石鎭·투수) 등을 탄생시켰다. 1997년의 스타는 이승엽이다. 고교 출신으로 입단 3년째를 맞은 이승엽은 시즌 초부터 선풍을 일으키며 홈런과 타점 및 최다안타상을 휩쓸어 팀 사상 4번째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그러나 이승엽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2년 뒤였다.

1998년 장타율과 출루율에서 1위를 차지한 이승엽은 1999년 국내 타자로는 최초로 전인미답(前人未踏)인 홈런 54개를 날려 ‘이승엽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홈런왕에 올랐다. 또한 타점과 장타율 및 출루율까지 석권, 또 한번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뿐만 아니라 1998년 12월 양준혁과 트레이드된 투수 임창용(林昌勇)은 팀 창단 18년 만에 방어율최우수투수에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특히 이승엽은 2001년 페넌트레이스에서 홈런 39개를 날려 홈런왕에 올라 타격왕 양준혁, 타점왕 타이론 우즈를 물리치고 개인 통산 3번째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2002년에도 이승엽은 국민타자라는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올렸다. 홈런 47개 등 타격 4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개인통산 4번째 MVP 수상의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도 9회 극적인 동점 스리런 홈런을 쏘아올리며 팀 우승의 발판이 되는 저력을 보였다. 또한 6회 연속 골든글러브(1루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 1983년 이만수의 연속경기 홈런 기록 ◎
날짜 장소 상대투수 내용 결과
① 4월 23일 대구 장명부(삼미) 2회 2점 4 - 7 패
② 4월 24일 대구 임호균(삼미) 2회 1점 4 - 0 승
③ 4월 30일 대전 황태환(OB) 6회 2점 6 - 4 승
④ 5월 1일 대전 장호연(OB) 2회 1점 3 - 5 패
타격 3관왕 이만수

‘헐크’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했던 포수 이만수(李萬洙)는 프로야구 초창기 삼성라이온즈의 안방을 지키며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슬러거로 이름을 날렸다. 이만수가 성가를 드높인 것은 1982년 3월 27일 MBC청룡과의 프로야구 개막전(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였다. 이만수는 1회 초 한국 프로야구의 첫 안타를 터트린 뒤 5회 초 첫 홈런을 날려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프로통산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또 이만수는 4경기 연속 홈런을 2번에 걸쳐 작성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2년 7월 10일 삼미슈퍼스타즈전(대구)에서 연타석(3, 5회) 홈런을 시작으로 프로야구 최초인 4경기 연속 홈런(7월 10일∼15일)을 터트린 그는 1983년 4월 23일∼5월 1일에 또 한번 연속홈런을 터트려 매스컴으로부터 ‘헐크’라는 별명을 얻었다.이 ‘최다경기 연속홈런’ 기록은 1988년 롯데의 김민호(金旻浩)가 5연속경기 홈런(4월 10일∼17일)을 터트림으로써 비로소 깨졌지만 이만수는 무려 5년간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만수가 진가를 발휘한 해는 1983년이었다. 시즌 최다 홈런(27), 최다 타점(74) 및 최다 승리타점(13)으로 최우수선수와 골든 글러브(포수 부문)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아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특히 이만수는 1984년 타율 0.340으로 수위타자에 오르며 홈런왕(23)과 타점왕(80) 및 장타율 1위(0.633)를 차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율, 타점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프로야구 출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1984년도 최우수선수상은 이만수를 비켜갔다. 김영덕 감독의 ‘타율 관리’가 화근이 됐다.


1991년 4월 27일 대구 LG전에서 프로 개인 통산 첫 600타점을 올린 이만수가 안덕기 사장, 조복래 단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만수는 롯데와의 마지막 2경기를 남겨둔 9월 22일 현재 300타수 102안타로 타율 0.340을 기록해 타격 1위에 올라 있었고, 홍문종은 삼성과의 마지막 2경기를 남긴 상태에서 360타수 122안타로 타율 0.339를 기록하고 있었다. 1위 이만수와는 불과 1리(0.001) 차로 뒤진 상태여서 이만수가 1타석만 공치거나 홍문종이 첫 타석에서 안타를 뽑으면 당장 순위가 뒤집힐 판국이었다. 이만수의 ‘타격왕 만들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김영덕 감독은 두 선수의 마지막 맞대결 무대인 삼성 - 롯데의 2연전에서 주전 포수 이만수를 벤치에 앉혀두고 홍문종을 ‘고의사구’로 걸리는 작전을 썼다. 이만수는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타격, 타점, 홈런을 석권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지만 MVP 투표에서 기자들의 외면으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할 수 없었다. 정정당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국시리즈 우승 투수인 최동원에게 몰표를 던진 탓이다. 1985년에도 이만수는 천하 제일의 강타자였다. 홈런왕(22)과 타점왕(87) 및 최다 승리타점(13)을 거머쥐어 진가를 발휘했다. 1986년에는 허리를 다쳐 무관왕이 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1987년 허리 부상의 후유증을 안고 타점왕(76)과 장타율 1위(0.579)를 차지하는 투혼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만수의 투혼과 도전 정신은 1997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이만수는 수위타자 1회(1984년), 홈런왕 3회(1983∼85년), 타점왕 4회(1983∼85년, 1987년), 승리타점 1위 2회(1983년, 1985년), 장타율 1위 1회(1984년)와 골든 글러브 5회 연속 수상(1983∼87년)의 영광을 안았다.

또 팬들에 의해 올스타로 11회(1982∼92년) 뽑히는 인기를 누리는 등 프로야구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만수는 개인 기록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프로 최초 200타점이나 300타점 및 100홈런은 출전 경기 수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당시 호남을 대표하는 거포들인 김봉연(金奉淵)과 김성한(金城漢)의 틈바구니에서 이룩한 것이어서 더욱 값지기만 했다. 또한 1984년 8월 23일 대구에서 열린 삼미전에서 1회 말 선제 2타점을 올리는 좌전 적시타로 프로 최초 200타점을 올렸고, 1986년 5월 21일 대구 MBC전에서 6회 말 김용수(金龍洙)로부터 2점 홈런을 빼앗아 프로 최초 300타점을 기록했다. 프로 최초 100홈런은 2년 뒤인 1986년 9월 2일 빙그레전(대구)에서 해태의 홈런왕 김봉연(金奉淵)보다 한 발 앞서 달성했다. 당시 100홈런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김봉연과의 홈런 경쟁이 예측을 못할 만큼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또 일간스포츠가 불을 질렀다. 대우자동차와 협찬으로 100홈런 선착 선수에게 르망 승용차를 부상으로 내걸어 팬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만수의 홈런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91년 9월 17일 해태전(대구)에서 프로 최초 200홈런을 기록했으며, 이어 1996년 8월 24일 현대전(대구)에서 프로 최초 250홈런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다. 이만수는 1997년 16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1,449경기에 출전, 안타(1276), 홈런(252), 타점(861), 득점(625)에서 팀 내 통산 1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황규봉의 투구 모습. 황규봉은 1985년 노장의 몸으로 35경기에 등판, 14승7패4세이브(방어율 3.04)을 올려 김시진, 김일융, 권영호 등과 함께 사상 첫 통합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구원왕의 원조 황규봉

프로야구 사상 첫 구원투수상을 수상한 황규봉(黃圭奉)은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시즌 초반에는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황규봉이 본격적으로 구원 전문 투수로 변신한 것은 1982년 후기리그부터였다. 선발 권영호(權永浩)와 이선희(李善熙)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구원에 나서 후기리그 우승을 이끌어 냈다. 황규봉이 선발로 마운드에 선 첫 경기는 프로야구 출범을 알리는 개막경기(1982년 3월 27일)였다. MBC청룡과 맞붙은 이 경기에서 6과 ⅔이닝 동안 7점을 허용, 7-7 동점에서 이선희에게 마운드를 넘겨야만 했다. 1982년 황규봉은 47경기에 등판, 15승11패12세이브(방어율 2.47)의 성적을 올렸다. 47경기 가운데 31경기에서 마무리로 등판, 9구원승11세이브를 챙겨 한 시즌 최다 구원승과 최다 세이브 및 최다 세이브 포인트(20=9구원승+11세이브)를 기록하며 프로 최초 최우수구원투수상을 수상했다. 황규봉의 31경기 구원 등판은 투수들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프로야구 초창기 사정을 감안할 때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황규봉은 이듬해인 1983년 선발로 전업, 30경기에서 6승4패3세이브(방어율 3.67)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1984년 30경기에서 10승2패4세이브(방어율 3.25)로 승률 1위(0.833)를 차지해 최우수승률투수상을 수상했다. 특히 황규봉은 이 해 초반인 4월 8일 삼미전(인천)부터 5월 30일 MBC전(잠실)에 이르기까지 13경기에 등판, 7승1세이브로 7연승을 기록해 전년도 9월 18일 롯데전(부산) 이후까지 승리를 합쳐 11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1982년 OB 박철순(朴哲淳)이 세운 22연승 이후 최다 연승이기도 했다.

황규봉의 활약은 1985년에 더욱 빛을 냈다. 노장의 몸으로 35경기에 등판, 14승7패4세이브(방어율 3.04)를 올려 김시진(25승5패10세이브), 김일융(25승6패), 권영호(6승6패26세이브) 등과 함께 사상 첫 통합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1986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황규봉은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54경기에 등판, 48승29패24세이브(방어율 3.08)의 성적을 남겼다. 또 20경기에서 완투하고 4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내며 8경기에서 무사사구를 기록하는 등 큰 흔적을 남겨 투수 코치로 중용되기도 했다.




◎ 연승기록 내역 ◎
날짜 상대팀 이닝 결과
1983.09.18 롯데 9
1983.09.25 삼미 9
1983.09.29 해태 7
1984.04.08 삼미 9
1984.04.15 롯데 5
1984.04.22 롯데 3
1984.04.26 삼미 2
1984.04.30 MBC 7 1/3
1984.05.03 OB 2 1/3 -
1984.05.05 MBC 2 2/3 -
1984.05.08 해태 2
1984.05.10 해태 3 S
1984.05.17 롯데 3 2/3 -
1984.05.20 해태 1 -
1984.05.24 롯데 4 1/3 -
1984.05.30 MBC 8

김시진은 1984년 9월 13일 대구 OB전을 시작으로 연승 기록에 도전, 1985년 7월 15일 대구 MBC전까지 22경기에서 16연승6세이브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첫 100승 투수 김시진

프로야구 첫 100승 투수 김시진(金始眞)은 1985년 재일동포 김일융(金日融)과 함께 통합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러나 김시진은 큰 경기에 약한 흠을 남겨 1988년 11월 22일 롯데 최동원(崔東原)과 트레이드됐지만 삼성에 머문 6년간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남겼다. 1982년 국가대표 선수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9월 4∼15일 잠실 인천)에 출전, 한국이 일본을 꺾고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해 주가가 오른 김시진은 특급 선수로 1983년 입단했다. 김시진은 특급 투수답게 페넌트레이스에서 37경기에 등판, 17승12패1세이브(방어율 2.55)를 올려 새로운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김시진은 후기리그 막판으로 접어든 9월 8일 인천 삼미전에 구원으로 등판, 10월 4일 대구 OB전에서 패할 때까지 45와 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져 한국 프로야구 최다 이닝 무실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1984년 5월 22일 대구 롯데전 승리를 시작으로 7월 9일 대구 OB전까지 8연승을 거둔 김시진은 9월 13일 대구 OB전을 시작으로 연승 기록에 도전, 1985년 7월 15일 대구 MBC전까지 22경기에서 16연승6세이브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기며 25승5패10세이브(방어율 2.00)로 김일융(25승6패 방어율 2.79)과 함께 삼성 역사상 최초로 다승왕을 차지하며 승률 1위(0.833)까지 거머쥐었다. 김시진의 16연승은 원년(1982년) OB 박철순(朴哲淳)이 세운 22연승에는 못 미쳤으나 그에 버금가는 기록으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살아 있다.



프로야구 첫 100승 투수 김시진은 1985년 재일동포 김일융과 함께 통합 우승을 이끈 주인공이다.

또한 김시진은 1987년 10월 3일 잠실 OB전에서 시즌 23승이자 프로야구 사상 첫 100승을 성취, 1985년에 이어 또 한번 다승왕(23승6패)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1983년 프로야구에 데뷔한 이후 5년 만에 달성한 100승은 당시 최고 투수로 각광받던 롯데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宣銅烈)을 제치고 선점한 것이어서 더욱 값졌다.

특히 김시진은 OB에 강한 일면을 보여 100승 가운데 26승을 챙겨 ‘OB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또 대구에서 60승을 올려 홈 구장에서 강한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러나 김시진은 이 해 벌어진 한국시리즈에서 2연패, 통산 7연패를 당한 끝에 홈이든 원정 경기든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삼성에서 활약한 투수들 가운데 최고였다. 1988년 11월 22일 롯데로 트레이드 되기까지 6년간 211경기에 등판, 111승49패16세이브(방어율 2.73)를 올렸다. 또 김시진은 61경기를 완투한 끝에 13경기 완봉승을 거두었고 무사사구 경기도 두 번(1983년, 1985년) 기록했다.


◎ 연승기록 내역 ◎
날짜 장소 상대팀 이닝 점수 결과
1984.09.13 대구 OB 9 4-1
1985.04.02 인천 삼미 9 6-0
1985.04.07 대구 MBC 8 2-1
1985.04.12 인천 삼미 8 3-0
1985.04.20 대구 삼미 7 6-1
1985.04.23 잠실 MBC 6 9-3
1985.05.10 광주 해태 1 2/3 7-2 S
1985.05.12 광주 해태 6 2/3 2-1
1985.05.15 부산 롯데 3 1/3 6-5
1985.05.19 대구 삼미 7 8-0
1985.05.22 대구 해태 5 7-5
1985.05.24 잠실 MBC 1/3 4-2 S
1985.05.25 잠실 MBC 10 2-1
1985.05.29 대구 OB 6 8-2
1985.06.08 대구 OB 10 5-4
1985.06.10 대구 OB 1 6-3 S
1985.06.12 대구 롯데 6 15-3
1985.06.18 서울 OB 2 4-2 S
1985.06.19 서울 OB 2 1/3 4-2 S
1985.07.08 대구 OB 7 3-1
1985.07.15 대구 MBC 3 2/3 2-1 S

타격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달인이었던 장효조의 호쾌한 타격 모습.


◎ 1983년 8연타석 안타 ◎
날짜 투수 방향 내용
05.10 10 황태환 우전 단타
05.14 2 장호연 좌월 홈런
05.14 4 장호연 1루 내야
05.14 7 황태환 우전 단타
05.14 9 장선두 우월 홈런
05.15 2 강철원 우월 홈런
05.15 4 강철원 중월 홈런
타격의 천재 장효조

타격의 천재 장효조(張孝祚)는 별명처럼 타격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달인이었다. 1982년 국가대표 선수로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9월 4∼15일 잠실 인천)에 출전, 사상 첫 우승을 뽑은 뒤 프로 무대에 첫 선을 보인 장효조는 1983년 시즌 초반부터 뛰어난 타격 솜씨와 선구안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장효조가 천재성을 드러낸 것은 프로야구 최초로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면서였다. 1983년 5월 10일부터 대구에서 벌어진 OB와의 연장 10회 말 안타를 성공시킨 장효조는 15일 OB전(대전) 4회 초 강철원(姜哲元)으로부터 홈런을 빼앗아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에 성공했다. 3연타석 홈런은 2000년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현대의 박경완(朴勍完)이 4연타석 홈런을 날려 17년 만에 깨졌지만 8연타석 안타는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살아 있다. 이 기록을 깨기 위해 허규옥(許奎沃 1985년 6월 19일∼30일), 이만수(86년 5월 7일∼10일), 김기태(金杞泰 2000년 7월 18일∼25일) 등이 도전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8연타석 안타에 그쳐 새 기록 달성에는 실패했다. 1983년 92경기에 출전한 장효조의 타격 솜씨는 317타수 117안타를 때려 타율 0.369로 첫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빛을 받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장타율(0.610)과 출루율(0.475)에서도 1위를 차지, 최우수선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홈런과 타점 및 승리타점을 석권한 이만수에게 밀려 최우수선수 등극에는 실패했다. 1984년 장효조는 또 한번 이만수에게 고배를 들었다. 타격 4위(0.324)로 처져 타격왕 타이틀을 이만수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출루율(0.424)에서는 당할 선수가 없었다. 1983 시즌에 이어 타이틀을 거머쥔 장효조는 1987년까지 5년 연속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1985년 타율 0.373으로 수위 타자에 올라 타격왕 타이틀을 되찾은 장효조는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이틀을 지킨 끝에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삼성이 두 번째로 배출한 최우수선수였다. 그러나 장효조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타격과 출루에 관한 한 제1인자였지만 위기 탈출 능력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큰 경기에서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효조가 1988년 시즌을 끝으로 12월 22일 롯데 김용철(金容哲)과 트레이드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 때문이었다. 장효조는 삼성에 몸담고 있었던 6년간 567경기에 출전, 645안타를 날려 평균 타율 0.356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냈다. 그러나 홈런은 48, 타점은 305에 그쳐 같은 시기에 홈런 124, 타점 405를 때린 이만수와 좋은 비교가 됐다. 하지만 장효조는 타격에 관한 한 자타가 인정하는 위대한 선수였다. 1992년 롯데에서 은퇴할 때까지 최우수선수 1회에 타격왕 4회, 출루율 5회, 장타율 1회 및 골든 글러브 5회 수상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타격의 천재’ 장효조. 1985년 타율 0.373으로 수위 타자에 올라 타격왕 타이틀을 되찾은 장효조는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이틀을 지킨 끝에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1989년 10월 2일 프로야구 최초로 100세이브를 달성한 권영호는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투수는 아니다. 1980년대를 수놓은 김시진과 재일동포 김일융이 양지의 스타였다면 권영호는 음지에서 팀을 뒷바라지한 스타였다. 하지만 권영호가 있었기에 팀이 찬란하게 빛을 낼 수 있었다.

특급 소방수 권영호

프로야구 최초로 100세이브를 달성한 권영호(權永浩)는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투수는 아니다. 80년대를 수놓은 김시진과 재일동포 김일융이 양지의 스타였다면 권영호는 음지에서 팀을 뒷바라지한 스타였다. 하지만 권영호가 있었기에 팀이 찬란하게 빛을 낼 수 있었다. 권영호가 특급 소방수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85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구원 투수로 마운드를 지킨 일은 있었다. 그러나 선발을 겸한 구원 투수여서 빛을 내지 못했다. 1985년 시즌 황규봉과 자리바꿈을 한 권영호는 생애 최다인 54경기에 등판, 6승6패26세이브를 올려 사상 첫 통합 우승을 견인했다. 권영호가 세운 6승 가운데 2승은 구원승이어서 세이브 포인트 28(구원승+세이브)로 개인 첫 타이틀인 구원왕에 오르는 영광도 함께 누렸다. 세이브 기록도 경신했다. 종전까지는 1984 시즌 OB 윤석환(尹錫環)이 올린 25세이브가 최다 세이브였다. 권영호가 1985 시즌 첫 세이브를 올린 경기는 4월 7일 잠실에서 열린 MBC와의 경기에서였다. 2-1로 리드하고 있던 9회 초 김시진을 구원 등판, 승리를 지킨 이후 4경기에서 연속 세이브를 기록해 구원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권영호가 마무리로 돌아서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원년(1982년) 무리한 피칭으로 1983년부터 2년간 허리 통증에 시달렸던 권영호는 퇴출 일보 직전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1985년 초 미국 플로리다의 베로비치 전지훈련에 합류, 체력을 강화시키고 변화구(체인지 업)를 개발하면서 기사회생의 실마리를 찾았다. 권영호의 세이브 행진은 1986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허리 통증이 재발, 19세이브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권영호는 7월 29일 청보와의 인천경기에서 8회 말 마무리로 등판, 2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1 - 0으로 승리를 지켜 사상 첫 50세이브를 달성했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인 100세이브는 1989년에 달성했다. 시즌 막판으로 접어든 10월 2일 빙그레전(대전)에서 7회 초 재일동포 송광훈(宋光訓)을 구원한 끝에 대망의 100세이브를 달성해 프로야구사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권영호는 이 해 노장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42경기에 등판, 4승5패19세이브의 성적을 올린 뒤 조용히 은퇴했다.

권영호는 8년간 288경기에 등판, 18경기를 완투했고 5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냈다. 통산 성적은 56승49패100세이브로 방어율은 3.06이었다.


◎ 연도별 세이브 내역 ◎
연도 구원승 세이브 포인트
1982년 4 2 6
1983년 1 7 8
1984년 0 2 2
1985년 2 26 28
1986년 1 19 20
1987년 4 18 22
1988년 6 7 13
1989년 3 19 22
21 100 121

부상으로 고생하던 김성래에게 1993년은 최고의 한 해였다. 생애 최다인 124경기에 출전, 5년 만에 3할대 타자로 복귀하며 홈런 28, 타점 91로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움켜쥐어 최우수 선수의 영예까지 함께 누렸다. 1993년 10월 7일 프로 데뷔 10년 만에 최우수선수로 뽑힌 김성래

불사신의 표본 김성래

“내게도 이런 순간이 있구나! 정말 꿈 같은 현실이다. 최우수선수라니 정말 황송한 상이다.” 1993년 10월 7일 김성래(金聲來)는 프로 데뷔 10년 만에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불굴의 투지로 얻어낸 상이었다. 그만큼 김성래의 10년 세월은 가시밭길이었다. 1984년 프로 무대에 섰을 때만 해도 김성래는 꿈 많은 선수였다. 그러나 타율은 0.186, 홈런은 1개, 타점은 3점에 불과했다. 후보 선수로 39경기에서 얻어낸 성적이었지만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김성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85년이다. 시즌을 앞두고 모두들 미국 플로리다 베로비치로 전지훈련을 떠날 때 김성래는 간염으로 국내에 남아 ‘나 홀로 훈련’을 했다. 1985년 성적은 성공적이었다. 주전 자리를 꿰차며 103경기에 출전, 타율 0.283에 홈런 16, 타점은 51이었다. 데뷔 첫 해에 비해 용이 된 것이다. 1986년 2루수로 골든 글러브를 첫 수상한 김성래는 1987년 99경기에 출전, 첫 3할대(0.332) 스타로 자리잡으며 홈런 22개로 홈런왕 타이틀에 이어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경사를 맞았다. 이만수의 대를 이은 2번째 홈런왕이었다. 그러나 1988년 9월 6일 해태와의 경기에서 수비 중이던 김성한과 부딪혀 무릎을 다쳤다. 무릎 후방 십자인대가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성래는 이 사실도 모른 채 2년을 버텼다. 해가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자 1990년 시즌이 끝난 뒤 미국에 건너가 무릎 수술을 받고 돌아와 1991년 30경기에 출전했다. 성적은 형편없었다. 구단은 3년간 연봉(3,000만원)을 동결, 부상으로 신음하는 김성래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1992년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해였다. 86경기에서 타율 0.292에 홈런 11, 타점 50을 올려 ‘돌아온 홈런 타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3년은 김성래의 생애 최고의 해였다. 생애 최다인 124경기에 출전, 5년 만에 3할대(0.300) 타자로 복귀하며 홈런 28, 타점 91로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움켜쥐어 최우수선수의 영예까지 함께 누렸다. 김성래는 1993 시즌 초반부터 홈런에 대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5월 5일 해태전(광주)에서 1경기 2홈런을 터트린 것을 시작으로 6월 15일 해태전(대구), 6월 24일 LG전(대구), 9월 4일 쌍방울전(전주)에서는 2연타석 홈런을 터트려 1경기 2홈런을 4차례 기록했다. 또 8월 31일에는 LG와의 대구경기에서 1회 말 좌월 2점 홈런을 쏘아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한 8번째 주인공이 됐다. 삼성 선수로는 1986년 9월 2일 이만수, 1990년 5월 31일 김용철(金容哲)에 이어 3번째였다. 그러나 김성래의 투혼도 또 한번 찾아온 병마 앞에서는 맥을 못썼다. 1995년 장딴지 근육통으로 주전에서 탈락, 1, 2군을 오가다 1996년 시즌이 끝나자 자유계약선수로 삼성을 떠났다.

1993년 입단한 양준혁은 최고의 신인 타자답게 매 경기에서 화제를 뿌리며 ‘괴물 타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3년 양준혁은 사상 최고액(타자)의 계약금을 받아 화제를 뿌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양준혁의 입단 기자회견 모습.

괴물 타자 양준혁

삼성라이온즈 20년 사상 양준혁(梁埈赫)처럼 화려하게 데뷔한 선수도 드물다. 입단할 당시 사상 최고액(타자)의 계약금을 받아 화제를 뿌렸기 때문이었다. 양준혁은 원래 쌍방울에 입단했어야 할 선수였다. 1991년 11월 20일에 실시한 ’92 신인 2차지명에서 쌍방울이 1순위로 지명, 계약을 서둘렀으나 양준혁의 거부로 무산된 일이 있다. 고향팀인 삼성에서 뛰기를 열망했던 양준혁이 쌍방울의 지명을 거부하고 군(상무)에 입대했던 것이다. 결국 양준혁은 1992년 11월 4일 실시한 ’93 신인 1차지명에서 삼성의 지명을 받아 1993년 2월 6일 정식으로 입단하게 됐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주목의 대상이 됐다. 양준혁은 최고의 신인 타자답게 매 경기에서 화제를 뿌리며 ‘괴물 타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攻)· 수(守)·주(走) 3박자에 넘치는 힘까지 지녀 투수들을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데뷔 첫 해 타율(0.341), 출루율(0.436), 장타율(0.598)을 휩쓸어 신인왕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팀 사상 최초의 신인왕이었다. 양준혁 선풍은 1994년에도 이어져 타점왕에 올랐고 1996년에는 타율 0.346으로 수위타자를 비롯해 최다안타(151)와 장타율(0.624) 1위를 차지해 개인 최초로 골든 글러브(외야수)를 수상했다. 특히 양준혁은 1996년 8월 15일 팀 사상 최초로 20(홈런)-20(도루) 기록을 달성한 뒤 8월 23일 현대와의 대구경기에서 프로야구 사상 8번째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 무르익은 타격 솜씨를 과시했다. 양준혁의 사이클링 히트는 1982년 6월 12일 오대석이 프로야구 및 팀 최초로 달성한 이후 팀 사상 2번째 기록이다. 그러나 천하 제일의 괴물 타자 양준혁도 이승엽의 출현으로 위세가 한풀 꺾여 1997년에는 골든 글러브 수상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1998년 수위타자(0.342)와 최다안타(156) 및 출루율(0.450) 1위를 거머쥐는 괴력을 발휘했으나 12월 14일 투수 보강 차원에서 해태의 특급 마무리 임창용(林昌勇)과 트레이드 됐다.

양준혁은 6년간 732경기에 출전, 3할대 타자로 평균 타율 0.328, 홈런 147, 타점 535를 기록하며 수위타자 3회, 최다안타 2회, 장타율 1위 2회, 출루율 1위 2회 등 9회에 걸쳐 타이틀을 수상했고 골든 글러브 3회 수상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양준혁은 해태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2000년 3월 24일 투수 보강을 위해 LG 손혁(孫奕)과 트레이드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렇다고 LG에서 둥지를 튼 것은 아니었다. 2001년 11월 5일 9시즌 활약으로 프리 에이전트 자격을 취득한 양준혁은 김응룡 감독의 요청으로 12월 21일 삼성과 4년간 계약금 10억원, 연봉 3억3,000만원 등 총 23억2천만원(플러스옵션 4억원, 마이너스옵션 6억원)에 입단 계약을 마쳤다. 양준혁은 2002년 페넌트레이스 기록상으로는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팀내 최고참선수로서 선수단을 하나로 묶고 팀 화합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등 팀이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양준혁이 있었기에 이승엽, 마해영과 함께 가장 안정되고 위협적인 클린 업 트리오도 형성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 선발 투수로 변신한 임창용은 2002년 36경기에서 선발로 29경기를 소화, 17승6패2세이브를 기록함으로써 팀의 2년 연속 정규시즌 1위에 일등공신이 됐다.
◎ 최연소 100세이브 이정표 ◎
세이브 날짜 장소 상대
1 1997. 4. 13 광주 롯데
10 1997. 5. 16 전주 쌍방울
20 1997. 8. 01 광주 LG
30 1997. 4. 27 잠실 두산
40 1998. 6. 21 전주 쌍방울
50 1997. 7. 30 대전 한화
60 1998. 9. 27 대전 한화
70 1999. 5. 21 대전 한화
80 1999. 6. 30 잠실 두산
90 199. 8. 11 잠실 LG
100 2000. 4. 14 대구 해태
세이브왕 임창용

프로야구 출범 20년 동안 삼성이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면 마운드 보강과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임창용(林昌勇)은 이 숙제를 풀기 위해 1998년 12월 14일 간판 타자 양준혁 외에 투수 곽채진(郭採振), 포수 황두성(黃斗聖)을 해태에 넘겨주고 받아온 특급 마무리 투수다.

1995년 해태에 입단한 임창용은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입단 첫 해 14경기에 등판했으나 2패. 1996년에는 49경기에서 7승7패에 그쳤다. 하지만 1997년 64경기에 등판, 14승8패26세이브를 올린 뒤 1998년에는 59경기에서 8승7패34세이브로 최우수구원투수상을 받았다. 특히 임창용은 1998 시즌 마무리로 56경기에 출전, 최다 등판 기록을 세우며 2년 연속 40세이브 포인트 기록까지 함께 세워 입단 3년 만에 특급 마무리 투수가 됐다.

사자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1999년 임창용의 구력(球力)은 더욱 빛을 냈다. 생애 최다인 71경기에 등판, 13승4패38세이브(방어율 2.14)를 기록했다. 자신의 최다 마무리 등판(64경기) 기록에, 최초로 50세이브 포인트를 돌파하며 생애 첫 방어율우수투수상을 수상해 삼성에게 사상 최초로 방어율 타이틀을 안겼다.

그뿐이 아니었다. 5월 13일 롯데전(대구)에서 8회 초 마무리로 등판, 2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지켜 마무리 사상 최연소(22년 11개월 9일)로 100세이브 포인트를 달성했다. 임창용은 여세를 몰아 7월 4일 현대전(수원)에서 3년 연속 30세이브 포인트, 8월 8일 두산전(대구)에서 3년 연속 40세이브 포인트와 팀 통산 500세이브를 함께 달성했다.
또 임창용은 9월 6일 롯데전(마산)에서 48세이브 포인트로 한 시즌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수립한 뒤 9월 18일 쌍방울(대구)전에서 50세이브 포인트 고지를 선점했으나 막판 두산의 진필중에게 따라잡혀 1포인트 차로 최다 세이브 기록과 구원투수상을 놓쳤다. 2000년 들어 임창용은 52경기에서 5승4패30세이브로 진필중(5승5패42세이브)에게 밀렸지만 기록행진은 계속 이어 나갔다. 4월 14일 해태전(대구)에서 세이브를 추가, 최연소(24년10개월12일) 100세이브의 금자탑을 세운 뒤 5월 25일 한화전(청주)에서는 150세이브 포인트를 달성해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2001년에는 선발 투수로 변신, 30경기에서 14승6패1세이브(방어율 3.90)라는 호성적을 올리며 에이스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이를 뒷받침한 것이 2002 시즌이었다. 36경기에 등판한 임창용은 선발로 29경기를 소화, 17승6패2세이브(방어율 3.08)를 기록함으로써 팀이 2년 연속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2002년 11월 10일 6차전 9회말, 한국시리즈 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을 날린 주인공 마해영. 끝내기 홈런을 치고 홈인하며 동료들과 얼싸안고 있다.

우승 사자(使者) 마해영

우승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수훈선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랬다. 2002 한국시리즈에서도 영웅은 태어났다. 절체절명의 순간 끝내기 홈런으로 21년 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끈 마해영(馬海泳)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시리즈 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을 날린 주인공이기도 한 마해영이 삼성 유니폼을 입은 것은 지난 2001년. 2000년까지만 해도 롯데의 주전 타자로 활약하던 선수였다. 1995년 1월 10일 계약금 1억8,000만원에 프로야구와 인연을 맺은 마해영은 1999 시즌 타율 0.372로 타격왕에 오르는 등 롯데의 간판 타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2월 1일 터진 선수회 파동에 휘말리면서 끝내는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는 수난을 겪게 됐다. 하지만 2001년 1월 31일에 단행된 마해영의 트레이드는 누구도 이해 못할 깜짝 놀랄 사건이기도 했다. 트레이드 상대가 무명선수나 다름없던 김주찬(金周璨·내야수)과 이계성(李啓星·외야수)이었기 때문이다. 마해영은 웃돈을 얹어서라도 잡아야 할 선수였다. 롯데의 입장에서는 절정기를 지나고 있는 선수를 보내고 젊고 가능성있는 유망주를 받기 위한 트레이드였던 것이다. 삼성의 입장에서 보면 마해영은 굴러 들어온 복덩이였다. 1998년 12월 14일 투수 보강 차원에서 양준혁을 해태의 임창용과 트레이드 한 뒤 거포 부재로 애를 먹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해영 기분은 그게 아니었다. 이승엽이란 거물의 그늘에 가려 빛을 낼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 포지션도 겹쳐 1루가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삼성에서의 첫 해 성적표는 1999년 이후 가장 좋았다. 타격 6위(0.328), 최다안타 4위(154), 홈런 5위(30), 득점 9위(86), 타점 8위(95), 장타율 7위(0.557), 출루율 8위(0.415) 등 공격 7개 부문에서 10위권 안에 든 것이다. 특히 8월 17일 대구에서 벌어진 한화와의 경기에서 3회 말 이승엽의 중월 솔로 홈런을 시작으로 매니 마르티네스와 카를로스 바에르가가 연속 홈런을 날리자 마해영도 이에 질세라 좌월 홈런으로 응수,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4타자 연속 홈런을 뽑아 내기도 했다. 2002 시즌 마해영은 이승엽과 함께 타선을 이끈 끝에 생애 처음 최다안타(172) 타이틀을 움켜쥐었다. 1999 시즌 수위타자를 차지한 이후 처음으로 움켜쥔 타이틀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타격 2위(0.323), 타점 3위(116), 장타율 4위(0.592) 홈런 5위(33), 득점 6위(92), 출루율 7위(0.386)라는 성적을 내어 푸짐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해영은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타선을 독려, 팀을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특히 우승을 결정짓는 6차전에서 보여준 끝내기 홈런은 한국시리즈 사상 가장 극적이고 가장 짜릿한 홈런으로 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프로야구 20년 사상 홈런 한 방으로 우승의 향방을 결정지은 예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을 굳힌 홈런은 두 번 있었다. 두 번 모두 공교롭게도 삼성이 희생양이 됐다. 1982년 OB베어스와 맞붙은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김유동(金裕東)이 4 - 3으로 리드하고 있던 9회 초 이선희로부터 만루홈런을 뽑아 우승을 결정지었다. 1984년도 8회 초 4 - 3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태에서 롯데의 류두열(柳斗烈)에게 3점 홈런을 얻어맞아 4 - 6으로 무릎을 꿇은 아픈 기억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에는 이를 만회라도 하듯 더욱 드라마틱한 홈런으로 프로야구 팬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21년 만에 우승의 기쁨을 안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은 9회 말 6 - 9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승엽의 쓰리런 동점 홈런에 이어 터진 것이어서 더욱 눈부셨다. 특히 이 홈런은 20년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한을 한 순간에 풀어준 값진 것이기도 했다. 1992년 11월 롯데의 신인 2차 지명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프로야구 입단부터 여의치 못했다. 자신이 원한 몸값을 받을 수 없게 되자 프로행을 포기하고 상무에 입대, 2년 6개월 동안 아마 선수로 떠돌기도 했던 마해영은 연고 팀에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삼성으로 온 지 2년 만에 우승 사자(使者)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2002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마해영이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2002년 12월 11일 골든글러브 시상식 만찬회장에서 황영기 삼성증권사장, 마해영, 박용오 KBO총재와 야구원로들이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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